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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편] 해도 달도 없는 여명에

―옛날 옛적, 한 옛날에…
최근, 누이는 때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감각을 느끼곤 했다.
누이는 예전부터 감이 좋다고 해야 할까, 남들이 알 수 없는 것들을 느끼고는 했다. 하늘을 보면 언제 비가 올지 알기도 했고, 올해의 여름은 더울 것이다 서늘할 것이다를 자신도 모르게 맞추고는 했다. 하지만 어째서 그것들을 자신이 알고 느끼는지는 누이 본인도 알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 그런 것들을 신기하게 느끼기에는, 누이 주변에는 비교할만한 대상이 너무나도 적었다.
누이가 사는 곳은 깊은 산 속의 오두막이었다.
가까운 마을은 산 골짜기 사이사이에 있는 짐승들이 쓰는 오솔길을 따라 반나절은 걸어야 하는 곳. 그마저도 누이는 어엿한 소녀가 되도록 내려가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 속세와는 떨어진 오두막에서 누이는 어머니와 오빠 라비, 셋이 함께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라는 개념 자체도 없던 누이는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마을에 갔다 다른 이들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에게 한 번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누이는 그 이상 그 질문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누이는 딱히 외롭다거나 쓸쓸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떡을 팔러 마을로 향할 때 외에는 언제나 누이와 함께 했으며, 무엇보다 어머니가 없을 때에도 누이의 곁에는 늘 오빠 라비가 있었으니까.
누이가 마을이나 사람이 잔뜩 있다는 도시를 동경한 것은, 외로워서라기보다는 색다른 곳과 많은 사람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산 속의 자연도, 그곳에 사는 새들이나 다람쥐와 같은 동물들도 모두모두 좋아했지만, 누이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좀 더 만나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누이는 어머니가 마을에서 돌아올 때마다 졸라 들은 이야기로 상상하고는 했다.
“그렇지만 혼자서 산을 내려가거나 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기에, 누이는 가끔 가다 떠오르던 ‘어머니 몰래 마을에 간다’ 는 생각을 접곤 했다. 누이가 그 이유를 물을 때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산에는 무서운 호랑이가 산답니다. 어머니 없이 누이 혼자 내려가다가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건 라비가 같이 내려가도 마찬가지랍니다.”
어머니의 말에, 슬그머니 오빠 라비 쪽을 바라보던 누이는 실망해 고개를 푹 숙였다. 라비는 실망하는 모습의 누이를 보고 소리 죽여 웃고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럼 다음에 어머니가 마을에 내려가실 때, 누이를 데려가시면 어떨까요? 저는 홀로 집을 보고 있어도 괜찮으니까, 맛있는 거라도 사주세요.”
“오라버니!”
라비의 말에 누이는 환하게 웃었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오빠 라비는 동생인 누이를 도와주거나 편을 들어줬고, 누이는 그런 라비가 좋았다.
누이는 이런 생활이 계속됐으면 하고 바랐다. 어머니와 오빠와 함께 하는 셋 뿐인 생활. 언젠가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다면 마을과 도시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적어도 그 때가 올 때까지는 세 가족의 행복한 생활이 쭉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누이는 때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감각을 느끼곤 했다.
그 원인이 된 것은, 좋아하는 오빠 라비의 모습이 요즘 이상해졌기 때문이었다.
라비는 다정하고 친절한 오빠로, 언제나 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둘은 함께 놀 거리가 적은 산 속이지만 소꿉놀이를 하거나, 가까운 곳으로 놀러가 산 속의 나무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산딸기를 따거나 하며 놀이를 함께 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런 친절한 라비는 조금씩 변해갔다. 라비는 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적어졌고, 혼자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누이도 라비에게 무언가 고민이 생겼다고 여겼다. 이 산 속, 셋 뿐인 생활에서 자신이 모르는 무슨 고민이 생겼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그렇게나 잘 놀아줬던 라비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오라버니, 뭔가 고민이 있으면 저에게도 말해주세요.”
“아니란다, 누이야. 괜찮아.”
하지만 누이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라비에게 말했지만, 돌아온 것은 정중하지만 차가운 거절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누이의 불안을 더욱 키웠다. 라비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거절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누이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다. 언젠가 마을에 내려갔을 때, ‘사춘기’라는 것이 되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한다고 들었으니까. 라비는 누이보다 조금이지만 더 어른이었으므로, 분명 그런 시기가 된 것이리라. 누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불길한 감각이 누이의 불안감을 키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라비가 방 안에서 혼자 정좌를 한 채 생각에 빠져있을 때, 계속된 재촉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누이와 함께 산에 들어가서도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채 생각에 빠져있을 때, 누이는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누이는 예전부터 감이 좋다고 해야 할까, 남들이 알 수 없는 것들을 느끼고는 했다. 그리고 라비를 볼 때마다 느낀 감각도 그런 것들이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감각. 정해진 무언가가 뒤틀려가는, 무언가가 엇갈리는 듯한, 동시에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저, 어머니.”
누이는 그런 감각이 느껴질 때면, 어머니에게 상담을 청하고는 했다. 누이의 부름에 마을에 팔 떡을 찧던 어머니는 누이를 돌아봤다.
“무슨 일인가요, 누이?”
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어떠한 이상도 느끼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누이는 더더욱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어머니는 누이가 만나본 누구보다 현명했다. 비가 언제 올지 아는 것도, 올해 여름이 더울지 서늘할지 아는 것도, 겨울이 추울지, 내년의 농사가 잘 될지를 설명할 수 없는 감각으로 느끼는 것은 누이 뿐만이 아니었다. 누이가 그렇게 느낄 때면, 어머니도 같은 것을 느끼고는 했다. 그렇기에 누이는 자신의 능력이 특별한지 알 수 없었고, 동시에 어머니도 같은 것을 느끼기에 자신의 감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이 느끼는 불길한 감각을 어머니는 느끼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 역시 라비가 어딘지 전과 달라졌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것만 같았지만,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어머니.”
결국 누이는 불안을 자신 속에 묻어두며 그렇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오빠가 요즘 이상하다? 불길한 감각이 든다? 고작 그 정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둘은 어머니가 더 빠르게 느끼면 느끼지,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라비가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머니도 잘 알고 있는 바였으니까.
누이는 그저 이것이 잠시 지나가는 일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누이야.”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왜 그러세요, 오라버니?”
자신을 부르는 라비의 말에, 누이는 종종걸음으로 라비의 곁으로 가며 물었다. 늘 혼자 시간을 보내는 라비가 자신을 부른 것은 오랜만이었기에 반가운 마음도 있었다.
어머니는 오늘도 마을로 나간 뒤였다. 라비는 마루에 걸터 앉은 채, 산들 사이로 살며시 드러난 저 먼 마을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이는 전부터 마을에 가고 싶다고 했었지?”
“네? 아, 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요.”
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서 사는 시간은 즐겁지만, 마을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누이가 나이가 들수록 더해만 갔다.
“어째서 우리는 이런 산 속에 사는 걸까?”
라비의 말에, 누이는 깜짝 놀랐다. 라비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누이도 늘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우리 가족은 이런 산 속에 사는 걸까?
마을에 내려 갔을 때, 자신들처럼 산 속에 사는 사람들도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어머니처럼 장이 열릴 때면, 혹은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마다 마을로 내려오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 이들은 사냥꾼이나 심마니, 나무꾼 등 산 속에 사는 것이 일이 편한 사람들이었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면서 누이는 떡을 찧어 마을에 파는 어머니는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비는 계속해서 마을 쪽을 보며 말했다.
“이 산 속에는 무서운 호랑이도 산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지. 어째서 그런 위험한 곳에 우리는 살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런 위험한 호랑이가 살아서 우리끼리 마을에 내려가면 안 된다고 하지만, 어째서 어머니는 멀쩡하신 걸까? 그리고 호랑이는 어째서 우리 둘만 있는 집에는 나타나지 않는 걸까?”
누이는 라비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하나 같이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그렇지만 아직 어린 누이는 그런 라비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무서움을 먼저 느끼게 되었다.
“그, 그럼 지금 집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건가요 오라버니?”
두려움을 꼭 숨기려 하며 묻는 누이의 말에, 마을을 바라보던 라비는 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딘지 진지한 표정이던 라비의 표정은, 겁을 먹은 누이의 얼굴을 보고 이전의 푸근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라비는 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걱정하지 말렴, 누이야.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지 않니?”
“그렇지만…”
“괜찮아.”
누이의 말에, 라비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에 조금 힘을 넣으며 말했다.
“설령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 오라버니가 쫓아내줄 테니까.”
“오라버니…?”
라비의 말은 자신의 두려움을 덜어주려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누이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라비의 말은 어딘지 무겁고, 각오가 된 듯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누이는 또다시 불길한 감각을 느꼈지만, 그 이상 물어볼 수는 없었다.
“좋아.”
누이가 할 말을 찾는 사이, 라비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서 가볍게 일어났다.
“둘이서 마을에 다녀올까?”
“네?”
라비가 너무나도 가볍게, 마치 산딸기라도 따러 가자고 제안하듯 말해서 누이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뒤늦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라비는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말했다.
“왜, 누이는 마을에 내려가기 싫니?”
“아뇨, 그건 아니지만… 어머니가 말씀하셨잖아요. 저희 둘이서도 마을에 내려가면 안 된다고 말이에요.”
누이는 라비를 말리고자 말했다.
“이 산에는 위험한 호랑이가 사니까, 함부로 마을에 가면…”
“그런 위험한 호랑이가 있는데.”
라비는 누이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어머니는 어째서 아무 문제도 없이 매번 마을에 다녀오실 수 있을까?”
“어머니가 거짓말을 하신다는 건가요, 오라버니?”
누이는 놀라서 물었다. 라비는 다정한 오빠이며, 착한 오빠였다. 어머니의 말을 잘 듣는. 그런 오빠가 어머니의 말을 의심한다는 사실 자체가 누이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라비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였다. 그렇지만 누이는 그 미소가 지금까지 봤던 라비의 미소와는 다르다고 느꼈다. 어째서인지 불안한 마음이 달래지지는 않았다.
“괜찮아. 방금도 말했잖니? 설령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 오라버니가 쫓아준다고.”
라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마치 누이를 재촉하듯 말했다.
누이는 왠지 모르게, 라비가 무언가를 시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머니의 말을, 경고를 시험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를 시험한다는 느낌을. 누이의 가슴은 불안함에 고동이 커져갔다.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는 것도, 호랑이가 정말 나타나면 어떻게 할지 불안한 것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라비의 제안 그 자체가 두렵기도 했다.
“자.”
라비는 다시금 재촉하듯 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불안함에 떨면서도, 누이는 천천히 그 손에 손을 뻗다가…
“어딜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누이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인가 어머니는 마을로 향하는 길목을 막듯이 서있었다.
“어머니?”
누이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어머니가 마을로 내려가신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었다. 마을까지는 반나절은 걸리는 거리. 벌써 어머니가 마을에 갔다 돌아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마을로 향하다 돌아왔다는 것일터인데, 어째서인지 그 이유를 누이는 알 수 없었다.
“라비, 누이와 함께 어딜 가려고 하셨던 겁니까?”
어머니의 목소리는 어딘지 화난 듯 들렸다. 누이는 그것이 어머니의 경고를 무시했기에 보이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해 떨었다. 어머니는 쉽게 화를 내지 않는 분이었지만, 라비나 누이가 어릴 적 사고를 치면 무섭게 혼을 내곤 했다.
라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굳은 표정으로 어머니를 마주 노려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라비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별 거 아니에요. 누이가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잠깐 산에 들어가서 놀다 오자고 했어요.”
라비의 대답에 누이는 다시금 놀랐다. 라비가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는 모습 역시 처음 보았으니까. 혼나는 것이 두려워서일까?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라비라면 비록 어머니에게 혼이 난다고 하더라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는 했다.
어머니는 라비의 대답에 한참동안 라비를 빤히 바라봤지만, 이윽고 작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다녀오세요.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말고요.”
“네. 그럼 다시 다녀오세요, 어머니.”
여전히 웃는 얼굴로, 라비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어머니를 배웅했다. 라비의 행동도, 어머니의 행동도 누이의 불안을 그저 부추기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며 둘러대는 라비의 행동, 그리고 갑자기 집으로 돌아와서는 경고를 남기고는 다시 마을로 향하는 어머니.
누이는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 뿐, 누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
불안을 해소하고자, 누이는 어머니와 라비에게 사정을 물어봤다. 그렇지만 어느 쪽도 누이가 원하는 해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괜찮습니다. 그저 일시적인 일이겠지요.”
어머니는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오라버니는…”
누이의 걱정스러운 말에, 어머니는 뭐라고 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누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윽고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어머니는 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겠습니다. 누이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라비와 이야기를 나눠보지요.”
누이는 그 말에 기대했다. 어머니가 물어본다면, 라비도 무언가 대답해줄지 모른다. 누이는 오빠의 고민이 무엇이든, 어째서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게 되었든, 분명 어머니가 나서면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잘 들으세요, 라비, 그리고 누이.”
어머니는 라비와 누이를 불러 앉혀놓고 말했다.
“이 산 속에서 사는 것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직 어린 여러분이 또래 아이들과 놀고 싶어하거나, 재미있는 것이 많이 있는 마을에 가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어머니의 말에 누이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의 말은 라비를 달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달래는 것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놀라는 누이를 내버려둔 채, 라비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산 속에서 사는 것은 그러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누이, 당신은 비가 올 때를 알거나 한 해의 날씨를 짐작할 수 있지요?”
갑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하는 어머니의 말에, 누이는 조금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라비, 당신은 밤눈이 좋으며, 또한 사람의 마음을 민감하게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기색은 잘 보이지 않지만요. 제 말이 맞습니까?”
어머니의 말에 라비는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놀란 것은 누이도 마찬가지였다. 오빠 라비가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으니까. 잠시 어머니를 마주보던 라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과 떨어진 이 산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을에 있으면 여러분의 힘을 이용하려는 이들이 다가올지도 모르니까요. 이 산은 산신이라 불리는 호랑이가 있는 영험한 땅. 그러한 나쁜 것들로부터 라비, 누이, 여러분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대답에, 누이는 이전부터 궁금해하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산 속의 삶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특히 라비의 말을 들은 뒤부터는 어째서 산에 사는가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의 대답에 또다른 불안이 생겨, 누이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저… 어머니, 그럼 저희는 어른이 되어서도 마을에서는 살 수 없나요?”
누이의 질문에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는 듯 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생각치도 못한 질문이라는 듯. 그 반응에 누이는 자신이 뭔가 말을 잘못했나 하고 걱정할 정도였다. 라비 역시 누이의 질문에 어머니의 반응을 지켜보겠다는 듯, 어머니를 빤히 바라봤다.
“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이.”
자신을 바라보는 라비의 시선과, 걱정된다는 듯 울먹거리는 것만 같은 누이의 시선에 어머니는 정신을 차린 듯 말했다.
“지금 산 속에 사는 것은 아직 라비와 누이가 어려서, 그런 나쁜 이들에게 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이가 어른이 된다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다행이에요.”
누이는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이럴 때면 푸근하게 웃던 어머니와 라비는, 그 대신 복잡한 표정으로 각자 누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지만 둘의 표정을 보지 못한 누이는 안심했다. 어머니는 자신과 라비가 궁금해하던 ‘어째서 이런 산 속에 살고 있는가?’는 질문에 대답을 해줬다. 누이는 자신과 라비, 그리고 어머니에게 특이한 힘이 있다는 것에는 놀랐지만,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있기에 그 놀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누이는 그보다는 어머니의 말이 어른이 된다면 그토록 바라던 마을에 마음대로 가도 된다는 허락으로 느껴져 기쁘기만 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라비가 긴 이야기를 나눈 날 밤, 누이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라비가 잠자리에서 일어난 것을 본 누이는, 왠지 모를 예감에 어머니가 잠든 방을 나갔다.
“누이냐.”
들려온 목소리에 누이는 깜짝 놀랐지만, 익숙한 오라버니의 목소리라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이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오라버니?”
하지만 목소리가 들린 쪽에는 어둠 뿐이었다. 누이가 눈을 깜빡이며 어둠 속을 바라보는 사이, 어둠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자지 않고 무슨 일이니?”
어둠 속에 완전히 묻힌 라비의 모습에, 누이는 말로 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라비는 그곳에 있는지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마치 어둠과 하나가 된 것만 같다고 누이는 느꼈다. 오로지 달빛을 받은 한 쌍의 안광만이, 그곳에 라비가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어둠은 무섭다. 누이는 쭉 그렇게 생각해왔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것은 누구나 그렇다고 어머니도, 마을에서 가끔 만났던 아이들도 말했다. 그래서 누이는 그런 두려움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마음 속에 담아뒀었다.
라비는 그렇지 않았다. 오빠 라비는 어릴 때부터 어둠 속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치 그곳이 자신이 있을 곳이라는 듯. 라비는 늘 말하곤 했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바로 지금처럼.
누이는 문뜩 어머니가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특별한 힘이 있는 것처럼, 라비에게도 특별한 힘이 있다고. 누이는 해가 뜰 때면 이상하게 몸에 힘이 생기고, 태양빛을 받으면 기분이 좋았다. 그렇다면 어쩌면 반대로, 라비는 어둠 속에서는 힘이 생기는 걸까? 그래서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
그렇지만 누이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 어둠은 누이의 본성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라비에게도.
“왜 그러니?”
라비는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오라비에게 오지 않을 거니?”
누이는 그런 라비의 모습에, 어떻게 느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어둠도 무섭고, 그 어둠과 하나가 된 라비 역시 무서웠지만,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라비가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간 것처럼.
“그렇구나.”
누이가 멈춰선 채 가만히 있자, 라비는 이해했다는 듯 손을 거두었다. 누이는 잠시 어둠 속에서 라비의 슬픈 듯한 표정을 본 것 같았지만, 다시 확인하기도 전에 그 표정은 어둠 속에 잠기고 말았다. 라비는 말했다.
“누이야, 너는 이 오빠가 좋으니?”
“네? 아, 네.”
누이는 라비의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오빠도 누이가 좋단다. 가능하면 계속 함께 있고 싶어.”
라비의 말은 마치 그럴 수 없다는 것처럼 들려, 누이의 의아함은 더욱 커져갔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오라버니? 아, 혹시 제가 어른이 되면 마을에 갈까봐 그러세요?”
고민 끝에 떠올린 누이의 생각은, 라비가 어쩌면 쓸쓸하다고 느끼는 걸까 하는 점이었다. 그래, 어쩌면 어머니 몰래 마을에 가자고 했던 것도 라비도 자신처럼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해서일지도 모른다. 늘 자신과 놀아주다보니 질려서 홀로 시간을 보내던 걸지도 모른다. 라비는 자신보다 어른이니, 이제 어린이인 누이와 놀아주는 것은 유치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누이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고민이 풀리는 것 같았다.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제가 어른이 되는 건 한참 나중의 일이고, 오라버니도 마을에 가서 살면 되잖아요? 혹시 오라버니는 산에 남으신다면, 제가 자주 보러 오면 되는 일이고요.”
마음의 걱정이 덜해지자, 누이의 목소리도 밝아졌다. 어둠과 그 속에 묻힌 라비에 대한 두려움도 어쩐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라비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자, 그런 두려움 같은 것은 사소한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하지만 라비의 메마른 웃음소리를 듣자, 밝아졌던 만큼 누이의 불안이 다시금 커졌다. 최근 느껴지던 불길한 감각이 몸을 휘감는 것만 같았다. 라비는 하늘에 떠있는 달을 올려보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누이야. 하지만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란다.”
“네?”
라비의 말에 누이는 깜짝 놀라 말했다. 자신의 오랜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라비가 그렇게 말한 것도 충격이었지만, 라비의 말투는 마치 확정짓는 듯한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미래를 보고 온 것만 같은, 확신에 찬 말투.
“이대로는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란다. 우리는 이 산 속에서 살고, 그리고…”
굳어버린 누이를 내버려둔 채, 라비는 마치 말을 고르듯 침묵했다.
“그리고 영영 헤어지게 되겠지.”
라비의 슬픈 듯한 말에, 누이는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불안만이 계속해서 커질 뿐이었다.
라비의 불안은 누이가 생각하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심각하고 거대한 무언가였다. 하지만 누이는 그 원인조차 짐작할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은 누이의 마음을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괜찮단다, 누이야.”
저벅, 저벅. 어느새 어둠 속에서 달빛으로 걸어 나온 라비는 그렇게 말했다. 얼굴에는 슬픈 듯한, 애틋한 미소를 띈 채 라비는 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런 운명은 이 오라버니가 바꿔줄 테니까 말이야.”
운명.
어째서인지 누이는 그 말이 무겁게 들렸다. 마치 가슴 속에 납 덩어리를 넣어두듯.
누이는 묻고 싶었다.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어째서 어른이 되면 이루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부정했는지, 요즘 왜 혼자 시간을 보내는지, 얼마 전 어째서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는지. 그동안에 쌓인 궁금증 모두를 묻고 싶었다.
누이의 가슴 속에는 불안이 쌓이고, 불길한 감각은 멈출 줄을 몰라, 누이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라비에게 그 이상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아서, 가슴 속 어딘가에서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느껴져서, 누이는 결국 울음을 참았다.
그리고, 다시 며칠 뒤.
그 날 아침, 어머니는 누이와 라비를 불러놓고 말했다.
“오늘은 아마 어머니가 늦게 올 것 같습니다.”
“늦게 오신다고요?”
“네. 한밤중에나 돌아올 것 같습니다.”
누이의 질문에 어머니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저녁 무렵에는 집에 돌아왔기 때문에, 누이는 어머니의 말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가, 누이는 그런 질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 속에 있는 무언가가 말리듯이, 자연스럽다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면 안 됩니다. 설령 돌아왔어도, 그것이 이 어머니인지 꼭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도록 하세요. 라비, 그건 당신의 일입니다. 아시겠죠?”
라비를 바라보며 다시금 확인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도,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라비의 모습도 누이는 이상하다고 여겼다. 어째서 어머니인지 확인하라고 하시는 걸까? 어째서 라비는 그런 말을 들어도 이상하다고 하지 않는 걸까?
그렇지만 그런 의문을 떠올리는 누이 역시, 무언가 질문을 입 밖으로 내선 안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어머니가 집을 떠나고, 낮동안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라비는 며칠 전 보여줬던 모습은 거짓말처럼 누이와 시간을 보냈고, 누이는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별 일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최근 느껴지던 불길한 감각이 어느 때보다 가슴을 두드리고 있음에도.
그리고 밤이 되어 누이와 라비는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누이는, 라비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창호지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달이 뜬 한밤중. 누이는 며칠 전처럼 라비가 잠이 오지 않아 마당에라도 나갔나 생각했지만,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아침에 어머니가 남긴 경고를 걱정하면서도 살며시 문을 열어보자, 라비가 신는 신발 역시 사라져 있었다. 마당에서 이어진 산길에는 라비의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누이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이는 고민했다. 오랫동안 들어온, 호랑이가 나오니 홀로 산길에 가선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도, 오늘 아침에 남긴 이상한 말도 신경쓰였다. 그렇지만 결국 누이는 집을 뛰쳐나갔다. 혼자 산길을 걷고 있는 것은 오빠 라비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오라버니―! 라비 오라버니―!”
언제 호랑이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소리를 지르면 자신을 노리고 올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을 느끼면서도 누이는 소리높여 라비를 불렀다. 누이는 그렇게 라비를 찾아 산길을 달렸다.
그리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오라버니…?”
누이는 라비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라비 뿐만이 아니었다.
산길 사이에는 공터가 있었다. 지금까지 마을로 향하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터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방에는 부러진 나무들과 파헤쳐진 흙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으니까. 마치 흉포하고 거대한 두 동물이 싸운 것처럼.
그 한 가운데에는 라비가 있었다. 라비는 누이가 부르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올려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라비에 가려져 정확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누이는 그것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제나 어머니가 입고 다니는 하얀 옷. 그 옷을 입은 누군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
깜짝 놀란 채, 누이는 두 사람의 곁으로 달려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는 예감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누이는 생각했다. 달려가는 찰나의 사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했다.
분명, 호랑이가 습격한 것이리라.
호랑이가 홀로 산길을 돌아오던 어머니를 습격했고, 오빠 라비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호랑이를 말리고자 맞서 싸웠다. 그렇지만 너무 늦어버렸고, 어머니는 그만…
아냐, 그럴 리 없어!
누이는 자신의 머릿속 생각을 쫓아내듯 머리를 흔들고는, 라비의 앞에 쓰러진 어머니의 맥을 살피려 했다. 미약한 맥이 남아있어 누이는 뒤늦게 안심했지만, 어째서인지 어머니 손의 감촉은 평소와는 달랐다. 거칠고, 털이 잔뜩 나있는 손.
그 손은 호랑이의 발이었다.
그 위화감에 누이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갑자기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누이의 옆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던 라비 역시, 그 빛 속으로 사라졌다.
“...아시겠습니까, 누이.”
긴 이야기를 마치고, 어머니는 확인하듯 누이에게 물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누이는 그 뒤에 벌어진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누이가 정신을 차린 곳은 처음 보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이었다.
상처를 입은 채 쓰러진, 어머니의 옷을 입은 호랑이. 그 사실에 두려움을 느껴야 했지만, 누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음하는 어머니의 상처를 어떻게 해야 하나 울상을 짓는 사이, 저편에서 수많은 이들이 다가왔다.
누이는 이번에야말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 했다.
처음 보는 복장의 사람들. 누이가 듣도 보도 못한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는, 심지어 동물이나 도깨비와 같은 존재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이 모여들자,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누이는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다른 세계나 저승에 온 거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하지만 겁에 질린 누이에게, 다가온 이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우린 너희 어머니와 아는 사이란다. 어머니를 치료하려고 모인 거고. 그러니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하얀 옷을 입은, 의원인 것 같은 아줌마는 누이를 달래듯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처럼, 모여든 이들은 상처 입은 어머니를 치료하고는 들것으로 옮겨갔다.
“자, 같이 가겠니? 누이 너도 어머니의 곁에 있는 편이 안심이 될 테고 말이야.”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깜짝 놀라 물어보는 누이에게, 의원 아줌마는 깔깔깔 하고 소리 내어 웃고는 말했다.
“물론 잘 알고 있단다, 누이야. 너희 어머니가 네 자랑을 엄청 많이 하셨거든.”
그리하여 누이는 처음 보는 그 장소에 머물며, 어머니를 간병하기로 했다.
“네가 누이로구나. 누님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단다.”
그런 누이를 가장 곁에서 지켜본 것은, 커다란 고양이였다.
“마스터 캣이라고 부르면 된단다.”
자신을 마스터 캣이라고 밝힌 고양이는 누이의 어머니와 오랫동안 아는 사이여서, 누이를 마치 조카를 대하듯 대해줬다. 마스터 캣과 다른 이들은 이곳은 어디이고 누구냐는 누이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누이가 도착한 곳은 라이브러리 월드. 모든 이야기들이 모이는 세계였다.
누이와 라비, 그리고 어머니 역시 이야기의 등장인물. 그리고 누이의 어머니는 이야기에 한 명씩 존재하는, 이야기가 원래의 줄거리대로 흘러가도록 관리하는 ‘현자’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누이와 라비의 이야기는 그 날 밤, 자신들을 찾아온 호랑이를 피해 각각 해와 달이 될 운명에 대한 이야기였다.
누이의 어머니는 호랑이 산신령으로, 정체를 숨긴 채 누이와 라비가 각각 해와 달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야기와는 다르게 라비는 호랑이와 맞서 싸웠고, 그 결과 운명이 뒤틀리며 누이와 라비, 어머니는 라이브러리 월드로 소환되게 된 것이었다.
“그럼, 오빠도 이 라이브러리 월드 어딘가에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단다. 하지만…”
기대에 차서 물어보는 누이와는 다르게, 마스터 캣은 곤란하다는 듯 말을 흐렸다.
“그 뒤의 이야기는 누님에게… 너희 어머니에게 듣는게 낫겠구나.”
마스터 캣은 누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마스터 캣 역시 현자의 일원이었다. 누이가 있는 이 장소는 현자들이 모이는 ‘현자회의’의 비밀 장소로, 라이브러리 월드와 이야기의 법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조율하는 장소라고 했다. 그곳에서 누이는 여러 현자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회복되는 것을 기다렸다.
“때가 되었군요.”
그리고 마침내 상처를 회복한 어머니는, 누이를 불러 이야기를 들려줬다.
원래의 운명, 그런 이야기와 운명을 지켜야 하는 현자로서의 책임, 마지막으로 라비의 행방에 대해서.
“라비는 스스로가 가진 어둠의 힘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의 힘을 노리고 라이브러리 월드와 운명을 뒤바꾸려는 악한 이들, 위치 퀸과 그의 조직인 ‘움브라’의 유혹을 받았지요. 아마 지금 라비는 그들과 함께 라이브러리 월드를 무너트리려 하고 있을 것입니다.”
누이는 그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 착하고 상냥하던 라비가 악당이 되었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야기 속과는 다르게, 자신이 현자임을 밝힌 어머니의 말에는 쉬이 부정할 수 없는 위엄이 존재했다.
“라비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리고 그런 라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태양의 힘을 가진 누이, 당신 뿐입니다.”
어머니는 누이가 가진 태양의 힘을 쓰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누이는 그 말을 믿지 못했으나,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자 마치 자신의 손이나 발을 쓰는 것처럼 힘을 다루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어쩌면. 누이는 생각했다.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가졌던 감이 좋은 것도 이 태양의 힘 때문 아니었을까 하고. 그리고 힘에 눈떠가며 누이는 알 수 있었다. 라비의 모습이 이상했던 것은, 이런 힘에 눈을 떴기 때문이라고. 태양의 힘에 눈을 떠가며 누이도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
지금까지 이야기 속의 시간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반복해왔으며, 그때마다 라비와 헤어져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해와 달이 되었다는 것을. 슬픈 운명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는 것을.
―미안하구나, 누이야. 하지만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란다.
그 말은 이런 뜻이었군요, 오라버니.
누이는 언젠가 라비가 했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운명은 이 오라버니가 바꿔줄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 말의 의미도, 누이는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자회의의 비밀 거점은 라이브러리 월드의 중심, 시놉 시티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높은 구름 위에 위치한 장소. 그 밑으로는 거대한 시놉 시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수없이 많은 등장인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누이가 언젠가 가고 싶어했던, 마을과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라비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리고 아마, 지금도 그 운명을 바꾸려 하고 있을 것이다.
누이는 그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오빠 라비와 움브라에 맞서, 그들이 노리는 현자회의의 비보 ‘라이트 오 라이트’를 지켜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음에도.
언젠가 오라버니와 맞서 싸우는 날이 오게 되겠지.
발 밑으로 펼쳐진 도시를 바라보며 누이는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슬픈 운명을 바꾸려는 오빠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오빠가 저지르는 악행을 막아야만 한다. 결국 슬픈 운명은 바뀌지 않았다.
이렇게 도시에 왔지만, 오라버니는 결국 제 곁에 없으시군요.
누이는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가슴 속 어딘가에서,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느껴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