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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경기장의 밖에서

The translated version of the Smash Novels will be here soon. Thank you.
“키히히힛!”
한밤중의 시놉 시티의 건물 위를,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빠르게 달려간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퍼트리며.
희미한 웃음소리를 들은 행인 하나가 소리가 들려온 건물의 옥상을 올려봤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허공을 베어내며
레드가 튀어나오고 있었으니까. 위치 퀸에게 선물 받은 마법의 가위, 공간 그 자체를 잘라낼 수 있는 ‘피카부’의 능력이었다.
처음에는 그 힘을 다루지 못하던 레드였으나, 스매시 레전드에서 이어진 싸움 덕분에 지금은 마치 자신의 수족을 부리듯 능숙하게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크, 너무 들떴나? 위험할 뻔했네.’
레드는 마음을 달래면서도, 발걸음은 늦추지 않은 채 건물의 옥상과 옥상을 건너뛰고, 때로는 공간을 갈라 장해물을 피하며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 무엇도 레드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머리 위에는 검은 하늘만이 가득하고, 밤공기는 시원해서 레드의 마음을 간질였다.
이야기 속에서는 어떤 것도 맛보지 못한 것이었으니까. 밤은 늑대가 나타나서 무서운 시간이었으며, 그 시간에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더는 아니지만!
옥상을 달리고, 걷어차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메롱, 하고 혀를 날름거려봤다.
그러니 들뜬 것도 어쩔 수 없잖아? 움브라의 특별 임무에 참가하는 건 오랜만이니까!
지금까지, 레드는 한동안 근신이라는 이유로 움브라의 활동에 참가하지 못했다. 멋대로 7D의 본사에 잠입했던 것을 볼프강이 문제로 삼았다고 들었다.
레드는 어차피 움브라의 적인 7D의 기지에 좀 쳐들어가면 뭐가 어떻냐면서 위치 퀸에게 빌기도 하고, 자신을 근신시킨 멍멍이,
볼프강에게 덤벼도 봤지만, 결정이 뒤바뀌지는 않았다.
그 꼰대, 다음에는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피카부로 싹둑! 하고 자르지 못한 것도 불만인데, 이야기 속에서부터 따라온 그 늑대, 볼프강은 심지어 움브라 안에서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기까지 했다.
게다가 부하들까지 있다! 나는 아무도 없는데! 레드는 볼프강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움브라가 활동하는 것을 그저 비밀 기지에서 기다리기만 하던 것이 오늘, 드디어 근신이 풀려 다시 임무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임무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은 기분이 좋지만, 자신의 역할은 정찰과 감시에 불과했으니까.
그런 거야 아무나 붙잡고 시키면 되는 거잖아. 레드는 기왕이면 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싶었다. 7D 본사를 플레어가 하는 것처럼 꽝! 하고 터트려버린다든가,
늑대들이 하는 것처럼 은행을 탈탈! 하고 털어준다든가. 그래야 움브라에서도 지위를 올릴 테고, 제대로 간부로서 취급을 받을 테고,
언젠가 위치 퀸 같은 위대한 악당이 될 테니까.
하지만 레드는 애써 마음을 억누르기로 했다. 바로 그 위치 퀸에게 들은 말이 있으니까.
‘레드, 네가 맡은 역할은 중요한 일이란다. 그러니 날 실망시키지 말렴.’
아아, 위치 퀸님. 역시 자상하셔. 레드는 위치 퀸의 기대를 실망시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레드를 가장 열 받게, 혹은 의욕이 나게 만든 것은 그 뒤에 따라온 볼프강의 말이었다.
‘뭐, 너 같은 꼬맹이는 감시 임무도 제대로 못 하겠지만…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군. 방해나 하지 마라.’
“그 멍멍이, 반드시 싹둑 하고 잘라줄 거야!”
볼프강의 말을 떠올리자 열이 올라 반사적으로 외친 레드는 아차, 하고는 입을 턱 막았다. 누군가 들은 게 아닐까 두근거렸지만,
다행히 한밤중의 거리는 여전히 고요한 상태였다. 레드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미리 정해진 감시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고 봐, 나도 제대로 임무를 성공시켜서 그 꼰대가 깨갱 소리도 못 내게 해주겠어!’
그렇게 레드가 각오를 굳히는 사이, 하늘 한편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레드는 얼굴의 웃음을 거두지 않으며 그쪽 하늘을 보며 말했다.
“시작했구나!”
레드의 가슴이 더욱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플레어는 따뜻한 불길이 좋았다.
어둠이 내린 거리를 밝히는 불빛. 차가운 밤공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열기. 그 모든 것이 플레어의 마음을 덥혀줬다.
플레어는 언제까지고 타오르는 불빛을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플레어다!”
“도망쳐!”
열기가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플레어뿐만이 아니었다. 플레어가 만들어낸 불길을 피하려는 듯 사방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플레어는 사람들이 자신이 전한 온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내심 슬펐지만,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달려간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꼈다.
이 추운 밤에 가족을 내버려 두고 거리를 떠돌던 사람들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줬으니까.
사람들은 플레어와 플레어가 만드는 불길을 무서워했다. 그들은 플레어가 사악하기 때문에 불을 지른다고 여겼다.
플레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플레어는 어디까지나 모두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불길을 피우는 것이었다.
이 차가운 도시에서 사람들에게 온기를 전해주기 위해서. 그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집들이 타오르고 건물이 불길에 잠긴다. 이 어둠 속에서도 마치 낮이 찾아온 것처럼 온 거리가 밝았다. 플레어는 붉게 물드는 집들이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플레어는 이 순간이 행복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불길을 만들도록 도와주는 움브라가 좋았다.
위치 퀸. 그녀가 플레어에게 모두에게 행복을 전할 방법을 가르쳐줬다. 단순히 성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성냥으로 자신이 직접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움브라. 자신이 살던 이야기와는 다른 낯선 곳에서도 온기를 전해줄 수 있도록 도와줬다. 자신의 무기 ‘매치메이커’를 만들어주고, 플레어가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따뜻한 음식과 푹신한 침대를 제공해줬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옷도 준비해줬다.
그런데도 움브라는 플레어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추운 날에 성냥을 팔고 오라고 하지도 않았고, 기지를 깨끗하게 청소하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플레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대가 없이 전해줄 뿐. 오히려 플레어가 원하는 대로 온기를 나눠주는 것이 움브라가 원하는 일인 것만 같았다.
플레어는 그런 움브라가 좋았다. 자신에게 이름과 목적, 그 외에 모든 것을 주는 위치 퀸에게 감사했고 그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보답의 방법이 또다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멋진 조직일까!
플레어는 더는 외롭지 않았다. 춥지도 괴롭지도 않아 늘 마음이 따뜻했다. 이 불길을 볼 때면 더더욱.
하지만 행복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플레어는 생각했다. 이럴 때마다 꼭 그 녀석이 나타난다는 것을.
“이런 짓은 그만둬, 플레어!”
봐봐. 역시 나타났잖아.
등 뒤에서 들리는 착지하는 소리와 목소리. 이럴 때면 늘 들려오는 목소리다. 플레어는 웃고 있던 표정에서 눈을 가늘게 뜨며, 등 뒤에 등장한 자를 돌아보았다.
하얀색의 옷. 건장한 체구. 기다란 창. 시놉 시티의 누구나 아는 그 모습.
히어로 스완.
“스완이 왔어!”
“도와주세요, 스완!”
“플레어를 쫓아줘요!”
스완의 등장과 함께, 도망치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응원을 보내기 시작한다. 스완은 그런 사람들의 응원이 당연하다는 듯 등으로 받으며,
착지한 자세에서 일어나 플레어를 향해 척, 하고 창을 겨누었다.
“네 악행도 이걸로 끝이야!”
플레어는 그런 스완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시놉 시티의 모두는 스완을 좋아한다. 플레어는 스완이 싫었다.
플레어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불을 지를 뿐이었다. 하지만 스완은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 말한다.
플레어가 온기를 베풀어줘도 사람들은 말리러 오는 스완을 좋아할 뿐이었다. 모두가 스완을 좋아한다. 스완이 플레어를 방해함에도. 봐봐.
겨우 사랑하던 사람들의 곁으로 가던 이들도 스완이 등장하니 다시 멈춰 섰어. 스완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에 가는 것을 싫어하는 거야!
플레어가 사람들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 싫은 거야!
“오늘도 절 방해할 생각이군요, 스완.”
플레어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무기, 매치메이커를 시험 삼아 발사했다. 따뜻한 불길은 문제없이 발사되었다.
스완도 싸울 준비를 하듯, 창을 고쳐 쥐고 플레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스완은 플레어가 하는 짓이 나쁜 짓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플레어는 나쁜 짓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왜 이것이 나쁘다고 하는지도 플레어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스완은 온기가 뭔지도 모르는 걸 거야. 플레어는 생각했다. 스완은 추위가 뭔지도 모를 거야. 언제나 따뜻한 집과 따뜻한 밥을 먹으며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이 세상이 사실은 따뜻하게 만들어줘야 하는 차가운 곳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걸 거야. 스완은 분명 마음이 차가운 걸 거야.
그럼 내가 이 불길로, 그 마음을 따뜻하게 해줘야지. 이 불길로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만들어주면,
분명 스완도 이게 좋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럼 스완이 늘 말하는 대로 친구가 되어 줄 수도 있어.
“플레어를 방해하는 분은, 뜨겁게 해드릴 거예요.”
“모두의 평화를 위해 싸우겠어!”
플레어가 스완을 향해 불길을 내뿜는 것과 동시에, 스완은 플레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 오늘도 화끈하게 놀고 있는걸?’
거리 저편이 대낮처럼 밝아지는 것을 보고, 골목의 어둠 속에 숨어있던 라비는 웃음을 흘렸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저쪽이 훨씬 재미있을 텐데 말이야.’
싸움을 좋아하는 라비는, 시놉 시티의 히어로 스완과 맞붙는 역할을 맡은 플레어의 쪽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스완. 평소에는 시놉 시티의 평범한 청소부로 지내는 새끼 오리지만, 누군가가 만들어준 변신 장치를 이용하면 시놉 시티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정의의 히어로,
스완으로 변신한다. 악당이 있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는 그 모습은 히어로라고 불리기 부족함이 없고, 그 강력함도 히어로로서 부족함이 없다.
라비도 몇 번이나 스완과 싸운 적이 있었다. 움브라의 소속으로서 위치 퀸이 내린 임무를 수행할 때도, 그냥 평소에 사방에 싸움을 걸고 다니며
강한 상대를 찾아다닐 때도. 스완은 늘 라비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강적이었다. 지금 당장도 뛰쳐나가 싸우고 싶을 정도로.
‘칫, 귀찮은 임무니, 뭐니만 없었어도…’
스완과의 싸움이라면 분명 신나고 즐겁겠지. 하지만 라비에게는, 오늘 밤 맡은 임무가 있었다. 라비는 도시 저편의 화염으로 향하는 의식을 애써 억누르며,
어둠 속을 움직였다. 어둠이야말로 라비의 힘의 근원이었으니까.
플레어와는 다르게, 라비는 위치 퀸에게 감사하는 마음 같은 건 없었다. 레드와는 다르게, 라비는 위치 퀸을 따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라비가 원하는 것은 그저 싸움뿐이었으니까. 세상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몸과 마음 전체를 바친 싸움.
뭐, 그래. 위치 퀸과 움브라가 그것들을 제공해주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둠의 힘을 지배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라비를 위해 이 ‘달 건틀릿’을 제공해줬고,
라비가 원하는 싸움을 얼마든지 제공해주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움브라는 라이브러리 월드를 지배하려는 악의 조직이니까. 싸울 상대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
현자회의의 위선자들, 7D의 수하들, 세력을 놓고 다투는 다른 악당들까지.
그렇지만, 라비는 늘 생각했다.
그런 것들과 싸우는 것보다, 위치 퀸과의 싸움이 재미있지 않겠어?
강력한 마법을 가진, 라이브러리 월드를 위협하는 강적. 어중간한 피라미들과의 싸움보다 그쪽이 재미있을 게 분명하잖아?
하지만 당장은 때가 아니었다.
과거, 라비는 위치 퀸과 싸운 적이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라이브러리 월드로 소환됐을 때, 라비는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위치 퀸에게 덤벼들었다.
어둠의 힘에 취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공격하고 부수고 싶은 충동에 몸을 맡긴 채.
그때의 라비는 누구에게도 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어둠의 힘은 이야기의 현자인 라비의 어머니, 호랑이 산신령을 가볍게 이길 정도로 강력했고,
라비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아니었다.
라비는 위치 퀸에게 패배하고, 그녀의 밑에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라비는 그것은 일종의 계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라비는 어둠의 힘을 다룰 수 없었다.
그저 힘에 잡아먹혀, 휘둘러질 뿐. 위치 퀸은 라비에게 힘을 제어할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고, 자신의 부하들, ‘그믐달 마녀회’를 통해 라비에게 달 건틀릿을 선물해줬다.
실험은 길고 고통스러웠지만, 마침내 라비는 어둠의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그 연습으로 지금은 위치 퀸의 명령을 듣고 있다. 움브라의 일원으로서.
‘당장은 어쩔 수 없지. 지금은 때가 아니야.’
라비는 몸이 근질거릴 때마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들려줬다.
위치 퀸과 싸우고, 그 곁에 있으며 라비는 위치 퀸의 힘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어둠의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라비는 위치 퀸과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은 더 힘이 필요했다. 어둠의 힘을 제어하는 것을 넘어,
다루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싸움을 통해 더 자주 힘을 사용해야 했다. 위치 퀸의 임무는 그를 위해 딱이었다.
‘도착했군.’
그런 생각을 하며 어둠 속에 숨어 거리를 달리기를 잠시. 여전히 등 뒤에서 번쩍이는 불빛이, 플레어와 스완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때, 라비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판을 발톱으로 긁는 듯한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늑대의 목소리였다.
“기다려라, 라비. 레드가 7D의 보안팀이 있다고 알려왔다.”
통신기를 통해 들려온 볼프강의 말에, 라비는 그림자 너머로 슬쩍 고개를 내밀어 목표를 바라봤다.
‘올드타운’은 시놉 시티의 한 구역으로, 다른 장소들이 발전된 라이브러리 월드의 기술과 분위기를 받아들였다면, 반대로 과거의 광경을 그대로 간직한 장소였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빌딩들과는 다르게 마치 중세 유럽의 거리를 그대로 재현한 것 같은 독특한 거리. 그 거리의 독특함은 주민들이 언젠가
자신들의 이야기로 돌아갈 것을 믿고, 혹은 라이브러리 월드의 발전된 문물에 적응하지 못하고, 원래의 삶과 익숙한 공간을 고수한 결과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건물, 라비의 목표는 그런 삶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성처럼 보이는 거대한 저택. 중세보다는 근대의 저택에 가까워 주위의 다른 건물들과는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그 이질감은 덕분에 저택의 특별함을 키우고 있었다. 시놉 시티 도심의 고층 빌딩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높은 첨탑이 솟아오르고,
넓은 정원과 돌을 세련되게 깎아 만든 벽들은 마치 그 품위가 주위의 저택들과는 다르다고 말없이 호소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저택의 입구에는, 움브라 멤버로서 익숙할 수밖에 없는 7D의 보안팀 유니폼을 입은 이들이 보였다. 각자의 무기를 든,
라이브러리 월드답게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도 섞인 몇 명. 경비병이라고 불러야겠지. 여전히 시놉 시티 저편에서
불길이 만든 붉은 빛이 비침에도 흔들림 없이 경비를 서고 있는 이들을 보며 라비는 말했다.
“이봐, 늑대. 양동작전으로 7D나 H.U.N.N.T 같은 귀찮은 놈들의 시선을 끌기로 하지 않았어? 앙?”
“잘 훈련된 모양이군. 그렇다면 정보가 맞다는 뜻이겠지.”
볼프강의 남 일이라는 듯한 말투에는 짜증이 났지만, 라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볼프강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기다려라. 지금 부하들을 보냈으니, 놈들이 시간을 끌면…”
“시간을 끌어? 무슨 소리야?”
라비는 거리로 나서며 송곳니를 드러내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오히려 이제야 재밌어졌는데!”
어둠 속에서 라비가 등장하자, 경비를 서고 있던 7D의 보안팀 인원들은 재빨리 무기를 들어 올렸다. 마치 위협하듯.
그렇지만 라비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아무런 두려움도 보이지 않은 채 저택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라비는 싸움을 좋아했다. 어둠의 힘을 맘껏 휘두를 수 있으니까. 그리고 힘을 쓰다 보면, 그 힘에 익숙해지게 되니까.
그리고 그것이 더 강한 적과도 싸울 수 있는 능력을 주게 된다. 싸울수록 강해진다. 싸울수록 힘을 지배하게 된다.
언젠가 위치 퀸도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이 세상 전체를 부술 수 있을 정도로.
7D의 보안팀은 우수한 인재들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이거나, 원래 병사나 장군이었던 이들도 많다.
그러나 라비가 그들 모두를 쓰러트리고 저택 안의, 목표가 있는 방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택 안은 외면의 고풍스러움에 뒤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고급 목재로 만든 바닥, 호화로운 벽지,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가구들,
벽에는 화려한 색채의 초상화나 각종 그림들. 개중에는 배의 타륜이나 해군들이 쓰는 날이 굽은 칼, 배의 선수상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조각상 들도 있었다.
라비는 코웃음을 치며, 쓰러진 7D 보안팀 인원들을 넘어가며 목표가 있는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러니까, 이렇게나 시간이 지나도록 인어공주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건, 역시 움브라가 개입했다는 뜻 아니겠소?”
가장 높은 층, 집무실로 보이는 커다란 쌍여닫이문 너머에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라비의 침입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목소리의 주인은 누군가에게 큰 목소리로 불만을 토하고 있었다. 젊은 남성의 목소리. 그 외에는 들리지 않아,
라비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라는 것을 추리해낼 수 있었다.
라비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역시나,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수화기 너머로 뭔가를 이야기하던 청년은 문이 열리자 놀란 눈으로 라비를 바라보았다.
“뭐지, 너는? 여긴 어떻게…”
지체 높은 옷차림과 말끔한 용모. 라비는 오늘의 목표인 왕자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라비의 모습에 놀란 목소리와 표정이던 왕자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깨달았다는 듯 눈에 적개심을 담았다. 수화기를 던지며 외쳤다.
“이 녀석, 움브라의 일원이구나! 경비병들은 어쨌지!”
“눈치가 빠르신데 그래? 오냐, 이 몸이 움브라의 일원이시다!”
라비는 왕자를 비웃으며 외쳤다. 당연한 걸 뭐 물어보느냐는 뜻을 담긴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왕자의 동작은 라비가 예상하지 않았던 동작이었다. 왕자는 목숨을 구걸하거나 상황도 이해하지 못하고 호통을 치는 대신,
망설임 없이 집무실의 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한 쌍의 검이 벽에 걸려있었다. 왕자는 그중 하나를 꺼내,
익숙하고 잘 단련된 움직임으로 라비를 향해 겨눴다. 라비는 그만 웃어버렸다.
“이놈! 뭐가 우습다는 것이냐!”
왕자는 라비의 반응에 화를 내면서 외쳤다. 하지만 그 검 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라비는 왕자가 제법 숙련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노우, 그 왕자가 한 말이 사실이었군. 내게 경고 했었지. 움브라가 여러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을 납치하고 있다고.
인어공주가 사라진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어. 이제 날 노리고 온 것이렷다?”
라비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인어공주? 누구야 그게. 그런 녀석은 몰라.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었든 내 알 바도 아니고. 그렇지만…”
달 건틀릿의 감촉을 확인하고, 싸울 자세를 잡으며 라비는 흉포한 웃음을 지었다.
“너에게 일어날 일은, 움브라 소행이 맞지.”
“네 이놈!”
기합과 함께, 왕자는 라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왕자가 휘두르는 검은 라비가 예상하던 것보다 빠르고 매서웠다. 라비는 달 건틀릿을 들어 올려 첫 검격을 튕겨냈지만,
왕자는 거침없이 다음 공격, 그다음 공격으로 검을 계속 휘두르며 라비를 몰아붙였다.
‘이 녀석, 밖의 보안팀 떨거지들보다도 잘 싸우는 거 같은데?’
라비가 그렇게 생각할 때쯤, 왕자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인어공주를 납치해갔다는 사실을 안 뒤로, 언젠가 싸울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 검을 연마했다! 그리 호락호락 당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왕자는 리듬감 있게 외치며, 그 사이로도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뒷걸음질을 치며 달 건틀릿으로 검을 튕겨내는 라비는 계속해서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왕자가 계속해서 검을 휘두름에도, 라비가 느끼는 것은 당혹감이 아닌 기쁨이었다.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이럴 때마다, 목표가 된 이들은 자비를 베풀어달라며 빌거나, 도망치려 하거나, 아니면 실력도 없으면서 필사적인 저항을 하는 정도였다.
그런 녀석들과 싸우는 것은 하나도 재밌지 않다. 싸움이란 상대가 되어야 재미가 있는 법이니까.
“그럼 나도 몸 좀 풀어보실까!”
라비의 달 건틀릿이 검게 물드는 모습에, 공포를 느낀 것은 몰아붙이던 왕자의 쪽이었다.
잠시 후.
“크흑…”
집무실은 폭풍우가 지나간 것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바닥을 이루는 목재는 이곳저곳 박살 나 구멍이 뚫리고, 벽 역시 검격과 충격에 부서진 곳이 많았다.
고급스러운 가구들도 산산조각이 나 장작더미로도 쓰기 힘들 나뭇조각들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서, 왕자는 부러진 검에 힘을 넣어 몸을 일으키고자 했지만, 결국 힘이 빠진 듯 다시 넘어져 버렸다. 라비는 코웃음을 치며 그런 왕자를 내려보았다.
“뭐야, 이걸로 끝이냐?”
자신을 내려보는 라비의 눈빛에 왕자는 이를 악물고 저항하려 했지만, 도저히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라비는 그런 왕자의 모습에 다시금 코웃음을 치고,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거울…?’
왕자는 어째서 라비가 그런 물건을 꺼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라비는 아무리 봐도 그런 물건을 들고 다닐 성격으로 보이지도 않은 데다,
싸움에서 이긴 지금 상황에서 거울을 꺼내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비가 꺼낸 거울은 독특한 외형을 가져,
왕자는 뒤늦게 그것이 무언가 마법의 힘을 담은 물건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왕자가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손거울 정도였던 거울은 갑자기 커다랗게 변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라비가 손을 놓았는데도 거울은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왕자는 놀라서 거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마법의 거울…”
왕자도 소문을 들은 적은 있었다. 움브라의 수장, 위치 퀸이 무기로 마법의 거울을 쓴다는 것은 이제 비밀조차 아니다.
스매시 레전드 경기를 통해 모두에게 알려졌으니까. 하지만 소문은 그 거울이 단순히 무기가 아니라, 수많은 또 다른 마법의 힘을 담고 있다고 했다.
왕자는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마법의 거울은 왕자를 비추고 있었다. 왕자가 그 너머에 비춘 것을 확인하려는 순간, 눈부신 섬광이 부서진 집무실 안을 가득 비췄다.
빛이 사라지자, 집무실에 남은 건 라비와 마법의 거울뿐이었다. 라비가 허공에 떠 있는 거울을 붙잡자, 거울은 다시 크기가 줄어들어
라비의 품 안에 들어갈 사이즈가 되었다. 라비는 거울을 품속에 집어넣고는, 부서진 벽 너머로 보이는 시놉 시티의 야경을 바라봤다.
기울어진 달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칫, 시시하군.”
라비는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알았다. 그만 돌아오도록.”
볼프강은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몇 번이나 해온 일이지만, 제멋대로인 움브라 멤버들을 규합하고 통솔해 임무를 진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싫어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는 레드,
불만 지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플레어, 싸움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라비, 그리고 그 외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움브라 멤버들까지.
‘그 멍청한 늑대 녀석들이랑 크게 차이도 없군.’
이것도 운명이라는 걸까. 볼프강은 떠올린 생각에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임무는 성공했지만,
볼프강의 일은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뒷정리를 하는 것 역시 볼프강의 일이었다.
“너희들은 저택에 가서 모든 걸 박살 내도록 해라.”
볼프강은 대기하고 있던 ‘만월의 늑대떼’ 소속 늑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늑대들은 즐겁다는 듯 키득거리며 말했다.
“돈 될 것들도 부숩니까, 보스? 좀 아까운데요.”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 대신 처리는 날 통해서 하도록.”
기대감에 킬킬거리는 부하들에게 깊은 한숨을 내쉬고, 볼프강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부하들은 ‘역시 보스는 통이 크다니까?’, ‘말이 통해’ 같은 말들을 자기들끼리 지껄이며 방을 나섰다.
멍청한 녀석들. 볼프강은 팔짱을 끼고 상황판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 모든 작전은 극비에 이루어진다. 아직 움브라가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을 납치한다는 사실은 알려져서는 안 된다.
저택에 돌입해서 특정 인물만을 납치해 사라진다? 너무 빤히 보인다. 그렇기에 늑대를 보낸다. 저택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그 습격자의 정체와 목적을 흐린다.
비싼 집기들도 챙기면 좋다. 도둑의 소행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 늑대들이 멋대로 처분하게 내버려 두면, 물건의 행방을 쫓으면 움브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렇기에 볼프강이 처리한다. 대부분은 움브라의 활동 자금이 되고 늑대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얼마 안 되지만, 멍청한 부하들은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볼프강은 다음으로는 습격에 참여한 멤버들에게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라비는 대답이 없었다. 늘 그랬기에 볼프강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플레어는 처음에는 대답이 없었다. 재차 묻자 그제야 답이 왔다.
“플레어는 지금 바빠요. 무슨 일인가요?”
바쁘다는 말대로, 수화기 너머에서는 플레어의 매치메이커가 불을 뿜는 소리와 폭발하는 소리, 스완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볼프강은 말했다.
“오늘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돌아와라.”
“충분하다고요? 하지만 아직 온기가 부족한걸요.”
플레어는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볼프강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말했듯이, 오늘은 그걸로 충분하다.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을 테니 그만하고 돌아오도록.”
“아이참, 약속하신 거예요.”
여전히 플레어는 불만인 모양이었지만, 알았다는 듯 대꾸하고는 통신을 끊었다. 플레어는 그렇게 말했으면 지킬 아이다.
누구도 좀 닮으면 좋겠군. 볼프강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마지막 상대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뭐라고? 난 아직 아무것도 안 했다고!”
말을 마치자마자, 예상한 대로 귀를 찢을 듯한 고함이 들려왔다. 미리 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떨어뜨려놨기에, 볼프강은 상대가 다 떠들도록 기다린 뒤 말했다.
“임무는 끝났다. 네 역할도 끝났고. 조속히 돌아와라, 레드.”
“시끄러 이 멍멍아! 누가 네 말 같은 거 들을 줄 알아?!”
레드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린애처럼 외쳤다. 볼프강은 수화기 너머로도 그 모습이 눈에 잡힐 듯 보이는 것 같았다.
볼프강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탓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 전등불에 번뜩였다.
“내 말대로 감시 임무 하나 제대로 못 끝낼 생각인가? 위치 퀸님께서 너에게 내린 명령은 뭐였지? 앞으로 다시는 움브라의 임무에 참가하지 않고 싶나?”
으르렁거리며 정론으로 지적하는 볼프강의 말에, 레드는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게 되었다. 볼프강이 또 위치 퀸에게 고자질하면,
자신을 기대해준 위치 퀸을 실망시키는데다 또다시 근신이라며 임무에 끼워주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흥이다! 누가 네 명령대로 움직일 것 같아?!”
하지만 레드는 통신기를 향해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통신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통신이 두절되자, 볼프강은 수화기를 한 번 쳐다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할지는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이럴 때마다 늘 그렇듯, 자기 혼자 멋대로 7D에 쳐들어가겠지.
아까도 저택 입구에 보안요원들을 보고 자기가 나서서 싸우겠다고 난리였으니까.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지시를 무시해대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플레어와 레드는 매번 벌어지는 이 작전의 진짜 목적을 알지 못하니까.
볼프강은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레드는 이미 몇 번이나 7D에 숨어들어 문제를 일으켰고, 여태까지 잡히지 않았다. 이제 와서 잡힐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에 레드가 문제를 일으키면, 오늘 밤 일어난 일의 흔적을 지우기도 쉬워지리라.
그렇지만 역시 다음 임무에서는 빼고 싶군. 볼프강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브라의 비밀 기지 통로는 늘 그렇듯 어두웠다. 마법으로 만든 푸른 횃불이 드문드문 놓여, 고풍스럽지만 으스스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볼프강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통로를 따라 걸어, 위치 퀸의 방문을 노크하고는 열었다.
“끝났나, 볼프강?”
위치 퀸은 볼프강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볼프강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왕자를 확보했습니다.”
“현자가 아니라는 게 아쉽지만, 뭐, 옥타비아 본인을 지금 확보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다음에 습격할 이는 현자의 일원이면 좋겠네.”
위치 퀸은 별다른 감흥 없이 말했다. 볼프강은 고개를 숙인 채, 위치 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위치 퀸은 몸을 돌려 볼프강을 보고는 미소 지었다. 그대로 위치 퀸은 자신을 위한 움브라의 왕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위치 퀸이 손가락을 휘두르자,
마법의 거울이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거울은 방 안이 아닌, 어딘지 모를 끝없는 검은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그 사이로 희미한 불빛들이 몇 개나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위치 퀸은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 지은 채 말했다.
“많이도 모였구나. 이로써 라이브러리 월드의 이변은 더더욱 가속화되겠지.”
볼프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브러리 월드의 이변. 이 모든 일의 시작.
라이브러리 월드는 모든 이야기가 모이는 세계. 이야기들은 그 끝을 맞이하면,
라이브러리 월드로 돌아와 새로이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그 흐름이 라이브러리 월드를 유지시켜왔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흐름은 깨지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끝을 맞이하기도 전에 등장인물과 배경이 라이브러리 월드로 돌아오기도 하고,
이야기는 새로이 시작되지 못하고 등장인물들은 라이브러리 월드에 묶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원인 모를 이변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비보,
‘라이트 오 라이트’를 건 대회인 ‘스매시 레전드’를 개최했다.
위치 퀸은 흐뭇한 얼굴로 마법의 거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등장인물이 필요하지. 주인공과 그들을 도와주는 조력자나 악당 같은 이들이. 그런 이들이 없이 이야기가 시작될 수는 없는 법이야.”
오랫동안, 그 이변의 원인으로는 움브라가 거론되었다. 위치 퀸이 수령으로 있는, 악의 비밀조직.
그렇지만 그들이 어떻게 라이브러리 월드의 이변을 일으킬 수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그렇기에 의심은 의심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할 수 없으니, 라이브러리 월드의 붕괴는 가속되겠죠.”
볼프강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위치 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그런 상태입니다.”
로빈의 보고에, 화면 너머의 스노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빈이 보고하는 내내 스노우는 그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로빈 역시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에, 말없이 그저 머리를 벅벅 긁을 뿐이었다.
이미 늦은 시간. 하지만 로빈은 오늘도 야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어쩌면 철야하게 될지도 모르겠고. 평소 같으면 연이은 야근과 철야에 우는 소리라도 냈겠지만,
요즘의 상황은 로빈 스스로가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그럴 기분조차 나지 않았다.
“...후우.”
잠시 후, 스노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로빈을 보며 말했다. 스노우 역시 연이은 격무로 인해 초췌한 얼굴이었다.
“알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로빈. 이번 왕자 습격으로 인해 또 다른 붕괴가 발생할지 모르니,
전 브릭 대표나 앨리스 대표와 대책을 마련해보겠습니다. 현자회의 쪽에도 제가 연락하죠.”
로빈은 피곤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물었다.
“본사 쪽은 문제 해결됐습니까?”
“뭐, 대충 어떻게든 쫓아냈습니다. 이번에도 그 꼬맹이는 놓쳤고요.”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의미와 몰려오는 짜증을 담아 로빈은 다시금 머리를 벅벅 긁었다. 보안팀의 일원으로서, 본사에 쳐들어온 침입자를 매번 놓쳤다는 이야기를
사장에게 보고하는 것은 무능하다는 반증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스노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겠죠. 그녀의 능력은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요. 뭔가 훔쳐 가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확인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부상을 입은 보안팀 요원들도 살펴봐 주시고요.”
“네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로빈의 대답에 스노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통신을 종료했다. 로빈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한숨과 함께 피로를 털어버리려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늘 당하기만 하는구만, 우리는.”
이번에도 7D 보안팀의 작전은 실패했다.
늘 패턴은 똑같았다.
어느 날 밤, ‘만월의 늑대떼’의 늑대들이 난동을 부린다. 거기에 플레어가 또다시 거리에서 방화를 저지른다. 당연히 그런 일들을 막기 위해,
시놉 시티의 히어로 스완이 출동하고, H.U.N.N.T가 거리를 달린다. 시놉 시티 자경단도 그들을 막으려 든다.
그러는 사이, 시놉 시티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정체불명의 습격자에게 납치당한다. 그들 사이에 공통점은 없다.
각자 별개의 이야기 출신들이며, 서로 간에 연결점도 없다. 세간에는 그런 식으로 알려져 있다.
공통점은 각자의 출신 이야기에서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점. 그리고 이것은 보안팀 내에서도 로빈만 알고 있는 정보지만,
그중에 현자의 비율이 높다는 점 정도. 누가 이야기의 현자인지는 현자들 사이에도 비밀이다. 물론 현자로 널리 알려진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현자들은 일반인들 사이에 조용히 숨어 지낸다. 이야기의 관리자라는 역할을 널리 알려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현자들이 실종됐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빈도가 늘어나며, 현자회의와 7D,
그리고 시놉 시티 자경단 등의 연합은 그 배후에 위치 퀸과 움브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막을 방법이 없단 말이지.’
로빈은 양팔로 뒤통수를 받친 채, 의자 등받이에 더더욱 몸을 기대며 생각했다.
그게 문제였다.
늑대들이 말썽을 부리거나 플레어가 방화를 저지르거나 다른 악당들이 활개를 치는 것은 늘상 일어나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습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에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시놉 시티에 사는 등장인물들이 위협받는다.
따라서 막기 위해 출동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인력은 부족해진다.
거기에 시놉 시티는 라이브러리 월드의 수도와 같은 도시, 그 안에 사는 등장인물들은 이제 세기도 힘들 정도다. 실제로 시놉 시티 자치회에서도
정확한 인구수는 조사할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늘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라이브러리 월드와 시놉 시티에 도착하는 데다,
적응하지 못하고 제대로 조사도 안 된 하층으로 밀려나거나 숨어버린 이들의 행방을 알 수도 없다.
수많은 이야기가 모이고 수많은 등장인물이 모였기에,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이들도 하나둘 단위가 아니다.
그들 모두를 사건이 벌어날 때마다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에 움브라가 어떻게 그 사람들을 납치해가는지, 아니면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모르고.’
습격의 소식을 듣고 달려갈 때마다, 로빈이 발견한 것은 텅 빈 공간 뿐이었다. 아무리 늑대떼나 다른 악당들이 강하고 빠르더라도,
반항하는 이를 데리고 갈 시간이 없을 때도 그러했다. 무언가 비밀이 있을 것은 분명했지만, 그 비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움브라에는 ‘만월의 늑대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 속 마녀들의 집합, ‘그믐달 마녀회’ 역시 움브라의 밑에서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마법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가끔 그 결과로 보이는 이상한 물건들을 움브라의 인원들이 쓰는 것을 로빈이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 마법 아이템인 걸까?
로빈은 자신의 감으로 그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속 경험에 의하면, 그런 마법의 무언가는 뭔가 약점이 있을 것이다.
보통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 정체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고민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또 며칠 내로 이야기 섬이 붕괴했다는 뉴스가 나오겠군. 또 야근이 이어질 테고…”
로빈은 떠오른 생각에 말이 되지 않는 신음을 흘리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이걸로 며칠째 야근이지? 망할, 이런 일을 원한 건 아니라고.
그렇지만 로빈의 기분을 망치는 것은 야근이 이어진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무력감. 로빈은 한때 의적이었다. 악당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돕는 의적. 그때의 정의감은 일에 지쳐 퇴근만을 바라보고 사는 지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다만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정의감이, 계속해서 악행이 일어나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도대체 움브라는 뭘 원하는 거야? 이래서 얻는 게 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로빈은 어딘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오늘도 힘든 회의가 또 이어지겠군요.”
스노우는 옷깃을 조금 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현자회의의 일원이자 7D의 의료책임자이기도 한 옥타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밤샘은 몸에 좋지 않으니 말리고 싶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없구나.”
옥타비아는 푹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늘 격무에 시달리는 스노우가 이 이상 무리하지 못 하게 말리는 것이 옥타비아의 역할이었지만,
그렇기에 이 이상 무리해야 될 상황에서는 더더욱 심정이 괴로웠다. 스노우는 그런 옥타비아의 마음을 알고 애써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라이브러리 월드의 모두를 위해서도, 지금은 괴로워도 견뎌낼 수밖에 없어요.”
늦은 시간이었기에 대책 회의는 간결했고, 회의라기보다는 오늘 일에 대한 보고에 가까웠다.
다만 날이 밝고 다시 열릴 회의는 아마 그리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스노우는 느꼈다.
그동안은 실종 사건은 그리 큰 사건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라이브러리 월드와 시놉 시티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운 상태였다.
물론 이변으로 인해 계속해서 등장인물들이 늘어나고, 이대로는 라이브러리 월드의 흐름이 완전히 멈춰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있었지만,
기술은 발전하고 생활은 평화로워 등장인물들은 천천히 새로운 라이브러리 월드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라이브러리 월드가 이상향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이야기 속에서 악역이었던 이들은 이곳에 와서도 여러 악행을 이어가려 했고,
이야기 사이의 알력도 있었다. 다양한 종족과 출신들이 모이다 보니 싸움도 잦았고, 이야기 속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사회,
발전된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진 이들도 많았다. 간간이 일어나는 실종은 이해할 수 있는 사건들로 생각되었다.
그때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스노우는 뒤늦은 후회를 숨길 수 없었다.
수많은 실종자 사이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움브라의 소행이 아닌가 의심했을 때는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붕괴한 뒤였다.
그리고 그 붕괴는 라이브러리 월드 그 자체의 힘의 약화로도 이어졌다. 현자회의의 영향력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세계 그 자체’가 약해지고 있었다.
구름 하늘 각지에 떠 있던 이야기 섬들이 하나둘씩 무너지며 떨어져 내렸다.
7D가 주축이 되어 래빗 컴퍼니, 브릭 건설, 제토페토 등 다양한 회사나 단체들이 나서서 이를 지원하고는 있지만, 라이브러리 월드의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시놉 시티에는 불안정한 이야기 섬을 떠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한층 더 붐비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혼란은 움브라를 막는 일을 더 힘겹게 하고 있었다.
스노우와 모두에게는 이야기 섬들을 지켜내고, 찾아온 등장인물들의 생활을 지원해야 하는 책임도 있었으니까.
“내일 회의에서는 스승님이나 현자회의의 강경파분들이 더 목소리를 내겠군요.”
스노우는 옥타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옥타비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자회의. 각 이야기를 담당하는 현자들이 모인, 라이브러리 월드의 관리자.
이전까지는 존재 자체를 숨기고 있던 현자들은, 라이브러리 월드의 이변을 계기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기로 결정했다.
라이브러리 월드를 지키기 위해, 각 이야기 간의 싸움을 막기 위해 ‘스매시 레전드’를 개최하면서.
그렇지만 현자회의는 수많은 현자들의 모임, 당연히 그 각각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말하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결이었다.
현자회의의, 현자의 본래 역할은 이야기가 줄거리대로 흘러가, 무사히 결말을 맞이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 중에는 비극이나
안타까운 사정을 지닌 등장인물도 존재하며, 줄거리대로는 그들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온건파는 철저히 줄거리,
혹은 ‘운명’에 따르는 것을 개선해야 한다는 이들이었고, 강경파는 이전의 방식을 지키려는 이들이었다.
이런 강경파와 온건파의 차이는 움브라에 대하는 태도에서도 충돌을 불러왔다. 움브라는 운명에 농락당하는 자신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들이었고,
강경파는 다시는 그런 이들이 나오지 않도록 더더욱 철저한 관리와 반대론자에 대한 탄압을,
온건파는 움브라 같은 이들이 나오지 않도록 보다 온건한 방식으로의 변화를 주장했다.
그런 차이는 움브라가 라이브러리 월드의 이변을 일으킨 주범이라는 심증이 나온 지금은 더욱 격렬해져, 강경파는 현자회의와 협력하는 집단이 본격적으로 나서
움브라와 공개적으로 전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온건파는 움브라와 대화와 타협에 나서기를 원했다.
“강경파들은 움브라와 전면전을 원하겠지만, 그랬다가는 안 그래도 균열이 가는 라이브러리 월드의 문제를 가속할 뿐이겠지.”
옥타비아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런 의견은 옥타비아 본인이 온건파의 수장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자회의가 아닌 7D에서 라이브러리 월드의 실상을 본 결과 내린 결론이기도 했다.
시놉 시티에 사는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는, 움브라를 지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야기 속에서 불우한 삶을 살았던 이들, 새로워진 시놉 시티에 적응하지 못해
현자회의나 기업들에게 불만을 품게 된 자들, 라이브러리 월드에 오며 자신이 이야기 속 인물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 등등…
움브라는 범죄를 일으키는 한편, 이들에게 자신들이 기존 지배자들에게 저항하는 혁명가들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자회의가 움브라를 직접 적대하게 된다면, 당장 라이브러리 월드는 두 개의 파벌로 갈리게 될 것이었다.
스노우와 옥타비아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어느새 둘은 7D의 통신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 사장실로 들어갔다. 거대한 창밖으로 보이는 시놉 시티는 여전히 어둠이 가득했다. 스노우는 직접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이 사태를 해결하려면, 스매시 레전드 대회가 필요해요. 이야기 간의 다툼이나 알력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도, 라이브러리 월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옥타비아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통신이 들어온다는 신호음이 들렸다. 스노우와 옥타비아는 거대한 벽면을 바라봤다.
벽면에 영상이 떠올랐다. 스노우의 스승이자 현자회의 내 강경파의 대표, 7D였다.
“또 위치 퀸에게 당한 모양이구나.”
7D의 말에, 스노우는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7D는 곧장 말을 이었다.
“지금 방식대로는 움브라가 라이브러리 월드를 붕괴시키는 것을 막기는 힘들겠지.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이냐, 스노우?”
“이봐요, 7D! 그게 무슨 말인가요!”
스노우를 나무라려는 7D의 말에, 옥타비아가 발끈하며 끼어들었다.
“지금 모두가 라이브러리 월드를 지키기 위해 힘을 쓰고 있고, 그중에서 스노우는 밤낮없이 일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옥타비아, 지금은 스노우와 이야기하는 중입니다. 당신과는 현자회의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지금은 자리를 비켜주십시오.”
씩씩거리는 옥타비아와 다르게, 7D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 점이 더더욱 옥타비아를 화나게 했지만,
스노우는 말없이 손짓으로 옥타비아에게 진정하기를 권했다. 스노우는 옥타비아가 심호흡을 하며 화를 삭이자 말했다.
“옥타비아 박사님, 죄송합니다. 스승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그사이 진정한 덕분에, 그리고 스노우의 지친 듯한 미소 때문에, 옥타비아는 뭐라고 더 말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스노우는 애써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스승님.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습니다.”
7D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노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스노우는 자신의 주변에 몇 개인가의 데이터 패널을 등장시키며 말했다.
“현자회의의 협력을 받아 보호 마법으로 남아있는 이야기 섬들을 보호하는 작업은 계속해서 진행 중입니다. 또한 우리 7D 컴퍼니뿐만 아니라 래빗 컴퍼니,
브릭 건설 등의 지원을 받아 기울어지거나 붕괴하는 이야기 섬을 보강하는 작업 역시 진행하고 있습니다.”
“잘하고 있다.”
스노우의 보고에 7D는 말했다. 하지만 그 말투는 칭찬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법이라고는 할 수 없지. 이대로 움브라와 위치 퀸의 계략이 진행된다면, 이 이상의 위기는 피할 수 없다.”
“알고 있습니다.”
스노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7D는 계속해서 말했다.
“스매시 레전드 진행에는 문제없겠지?”
“네. 그 부분 역시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스노우는 가끔 의문을 가지고는 했다.
현자회의 내의 강경파의 주류는 반발하는 등장인물들의 소란을 감수하더라도, 움브라에 대해서 전면전에 나서는 것. 그렇지만 스승 7D는 강경파의 대표 격이면서도,
그런 방침에 반대하며 움브라와의 대결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비밀리에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 이상 혼란을 부르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 이유 자체는 스노우 역시 바라는 바였지만, 스승의 행보에 무언가 이유가 있음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스노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7D는 근엄한, 하지만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브러리 월드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스매시 레전드의 성공적인 진행과 그 끝에 어떠한 소원이든 들어줄 수 있는 힘,
‘라이트 오 라이트’의 사용자를 정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자회의도 최선을 다해 지원할 테니,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7D는 말을 마치고 통신을 끊었다. 스노우는 긴장을 풀고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스매시 레전드 경기는 계속해서 이어져야 해. 그걸 위해 새로운 준비도 진행되고 있고. 그렇지만…’
스노우는 창밖으로 펼쳐진 시놉 시티의 야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어딘가에서 위치 퀸, 누님은 움브라를 이용해 여러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누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무엇을 원하시는 거지?’
위치 퀸의 목적은 간단했다. 자신이 모든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 숨길 필요도 없는 그 당당한 주장은 움브라의 메시지기도 했으니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일어나는 일련의 행동이 도대체 그 목적에 어떻게 부합되는지는, 스노우로는 상상할 수 없었다.
‘라이브러리 월드의 이변이 일어나고, 시스템이 무너지고, 이야기 섬이 붕괴하는 이 상황은 누님에게도 좋을 게 없을 텐데.
누님은 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거니까. 누님의 목적은 대체…’
야경을 바라보며, 스노우는 자신을 부르는 통신이 들어올 때까지 생각에 잠겼다.
‘후후, 고민하고 있구나, 스노우.’
마법의 거울 건너편으로 보이는 동생의 모습에, 위치 퀸은 미소를 지었다.
홀로 남은 자신의 왕좌. 그곳에 앉은 위치 퀸은 마법의 거울을 통해 스노우의 행동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이 순간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세간에 떠도는 소문대로, 마법의 거울에는 수많은 힘이 잠들어 있었다.
스노우는 아마 이런 사실은 모르겠지. 자신의 이야기의 내용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동생. 운명을 지키겠다면서,
그 운명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 동생. 그 허점이 바로 내가 결국에는 승리할 이유란다.
모든 것은 위치 퀸이 원하는 대로 되고 있었다.
움브라의 계획은 성공해왔고, 앞으로도 성공할 것이다. 움브라가 이야기의 중요한 인물들을 납치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정체를 숨긴 채 등장인물들 사이에 숨어 사는 현자들, 아직 라이브러리 월드로 돌아오지 않은 현자들도 습격해 그 수를 줄이고 있다.
삼장을 거울 속에 가둔 것은 큰 수확이었지. 현자회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들었으니까.
라이브러리 월드의 붕괴는 계속될 것이다. 라이브러리 월드는 순환을 통해 그 힘을 얻는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을 맞이하고 다시 라이브러리 월드로 돌아오는 것.
그 순환을 막은 이상, 붕괴를 막을 방법은 없다.
‘아니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위치 퀸은 스스로의 생각을 바로잡았다.
라이트 오 라이트. 현자회의의 비장의 수단. 흐트러지는 라이브러리 월드의 흐름을 되살릴 수 있는, 무슨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비보.
라이브러리 월드의 관심이 하나로 쏠릴수록, 그 의지와 관심은 라이트 오 라이트의 힘이 되어준다.
그렇게 모인 힘은, 움브라가 마치 댐을 만들듯 막아둔 흐름을 다시 움직이게 할 것이다.
그렇기에 현자회의는 스매시 레전드를 개최하고, 라이트 오 라이트를 상품으로 내건 것이다.
스매시 레전드 경기로 온 라이브러리 월드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그 힘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로 내가 원하는 대로 말이야.’
위치 퀸은 슬며시 미소지었다.
그렇게 강력한 힘이기에, 어떠한 소원이든 이루어줄 수 있는 힘이기에, 위치 퀸은 라이트 오 라이트를 탐냈다.
그렇기에 움브라를 조직했고, 현자회의에 맞서고, 라이브러리 월드의 이변을 일으키고, 현자회의가 라이트 오 라이트를 꺼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스매시 레전드는 계속되어야 한다. 현자회의와 가증스러운 일곱 난쟁이들, 아니, 지금은 7D라는 이름이었나, 그리고 스노우까지.
그들 모두가 이 나, 위치 퀸을 쓰러트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며 스매시 레전드와 라이트 오 라이트에 기대를 걸어야 하니까.
‘그렇지만…’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음에도, 위치 퀸은 불안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렇게 라이브러리 월드를 뒤흔들고 불안을 일으키면, 더욱 혼란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노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료들을 모으고, 계속해서 자신을 막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다른 레전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의를 잃지 않고, 자신의 회유에 넘어오지도 않고, 굴복하지도 않으며,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
마치 이야기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과거, 위치 퀸은 스노우에게 패배했었다. 더는 희망이 없을 상황에서도, 절망 속에서도 일어났다. 위치 퀸은 그 경험이 잊혀지지 않았다.
다른 레전드들, 그들 역시 이야기 속에서 절망을 맛보았음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점이 위치 퀸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너희는 그럴 수 있지? 주인공이기 때문에? 너희의 운명이 그렇게 이끌기에?
그렇지 않아. 만약 그렇다면, 나 역시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어. 이번에야말로 승리하는 건 나야!
위치 퀸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잠시 후, 위치 퀸은 왕좌에 다시 몸을 기댔다. 거울을 바라보며 위치 퀸은 말했다.
“...그래, 알고 있어.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지. 그건 변하지 않아.”
위치 퀸은 누군가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방 안에는 오로지 위치 퀸과 마법의 거울이 있을 뿐이었다. 거울 너머는 더 이상 스노우를 비추지 않았다.
그저 끝없는 검은 허공만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위치 퀸은 그런 거울 면을 손가락 끝으로 훑으며 말했다.
“맞아, 문제는 없어. 앞으로도 계획은 많이 남았으니까. 마침내 라이트 오 라이트를 손에 넣고, 라이브러리 월드를 지배하는 건 바로 나, 아니, 우리야.”
위치 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거울 속의 악마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