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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편] 돼지의 꿈

만월이 떠있는 밤.
“아우우우우우-…”
브릭은 선명하게 들린 늑대 울음소리에 심장이 쪼그라드는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늑대의 포효를 처음 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소리는 그 어느때보다 가까이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닐 거야.’
브릭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한쪽 벽에 설치한 망원경에 눈을 갖다댔다. 그리고 잠시 후, 브릭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망원경 너머로 보인 것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어지럽게 휘날리는 짚더미들이었다.
“아, 안돼! 스트로우 형!”
브릭은 비명을 지르며 두 번째 망원경으로 달려갔다.
‘우드형의 집은… 그럴 리 없어. 단단한 나무로 지었잖아.’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두 번째 망원경 속엔 무자비한 파괴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빠악! 우지끈!
달빛을 등진 늑대가 통나무 집을 향해 커다란 앞발을 내리찍자 벽을 이루고 있던 나무는 발톱의 궤적을 따라 v자 형태로 갈라졌고, 뒤이어 반월을 그리듯 휘둘러진 발차기가 조각난 나무들을 파편으로 만들어 사방에 흩뿌렸다.
통나무 집은 이미 절반쯤 무너진 상태였지만, 늑대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빠르지만 난잡하지 않게, 마치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해체하듯 집을 부숴나갔다.
“히익..!”
브릭은 흉폭하게 날뛰는 늑대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순간, 나무집을 박살내고 있던 늑대는 마치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동작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번쩍ㅡ!
때마침 내리친 번갯불에 비친 늑대의 눈동자는 망원경을 뚫고 브릭의 눈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브릭은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그의 몸은 굳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늑대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 달려와 브릭을 집째로 집어삼키…
“허어억!”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브릭은 가뿐 숨을 몰아쉬며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시놉 시티 중심부에 두텁게 쌓아올린 벽은 잠들기 전과 같이 멀쩡했다.
“꾸, 꿈이었구나…”
브릭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브러리 월드로 온 지도 한참이 지났지만, 늑대가 나타나는 악몽은 좀처럼 멈춰지지 않았다.
‘괜찮아. 이곳은 안전해.’
브릭은 자꾸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문처럼 안전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 브릭이 살고 있는 집은 시놉 시티의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요새나 다름없었고, 그것도 모자라 매일같이 보강과 증축을 계속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장벽을 아무리 굳건하게 쌓아놔도 심약한 그의 마음은 조금도 두꺼워지지 못했고, 특히 이렇게 악몽을 꾼 밤이면 오랫동안 잠에 들지 못했다.
브릭은 시원한 공기라도 쐬어야 겠다는 생각에 침대에서 일어나 굳게 걸어잠근 빗장을 들어올리고 창문을 열었다. 창문 너머 높게 쌓아올린 외벽 위로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었다. 마치 그때처럼.
브릭은 형들이 습격당하던 날와 같은 모양을 한 달을 보자 불길한 기운이 다시 한 번 발밑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늘 하던대로 양손으로 반대편 팔을 맞잡으며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려는 순간, 브릭의 집이 크게 흔들렸다.
콰아아앙-!!
잠시 후 놀란 브릭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매캐한 연기와 무너져 있는 외벽. 그리고 그 두 귀가 삐죽하게 솟아 있는 늑대들이었다.
폭발로부터 몇분 전.
‘만월의 늑대떼’ 소속 늑대 세 마리는 브릭의 집에 바짝 달라붙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여기서 한몫 단단히 벌 수 있다는 게 확실해?”
“얼마 전에 위치퀸님을 찾아왔던 기계몸 사업가 잭’O 알지? 비밀 회담을 끝내고 나갈때 기회다 싶어서 큰 돈을 만질 만한 거리가 없는지 붙잡고 물어보니까 공짜론 안된다고 해서… 그 동안 모은 돈을 팍팍 찔러주니까, 결국 나만 알고 있으라고 특급 정보를 하나 말해주더라니깐.”
“뭐, 뭘 알려줬는데?”
“흐흐. 여기가 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남는 금들을 모아두는 창고랜다.”
그들을 데리고 온 모자 쓴 늑대의 말에 나머지 두 늑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놉 시티 최고의 보석상점 ‘황금알 거위’. 그 상점의 주인인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보유하고 있는 금과 보석은 너무 엄청난 양이라서, 그것들이 한번에 풀리면 시놉 시티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줄 거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게 정말이야? 몇달 전 구미 사건 이후에 황금알 거위에서 보안 수준을 훨씬 높였다던데?”
“야. 그러니까 더 말이 되지. 그 정도로 대단한 걸 숨겨놓지 않고서야 이렇게 두껍고 큰 벽을 여기다 지어놨겠어?”
모자 쓴 늑대의 그럴듯한 말에 나머지 늑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달 전 구미 일당이 황금알 거위에서 일하는 생쥐를 협박해 보물을 빼돌리다 잡힌 사건은 시놉 시티 전역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때 일개 직원이 가지고 나온 금과 보석들만 해도 몇 박스였다고 했는데,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직접 보관하는 창고라면…그 규모와 가치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날 게 분명했다.
산더미 같은 보물을 떠올린 늑대 한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였다.
“꿀꺽... 그, 그런데 이 벽을 어떻게 무너뜨리지? 어지간한 폭약으론 움직이지도 않을 것 같은데…’플레어’라도 불러와야 하는거 아니야?”
침을 황급히 삼킨 늑대는 돌벽을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바보같긴. 여기서 대규모 폭발이라도 일어나면 H.U.N.N.T랑 자경단 놈들이 가만히 있겠어?”
모자 쓴 늑대는 생각을 좀 하고 말하라는 듯이 핀잔을 준 뒤, 가지고 온 자루에서 커다란 드릴 모양의 장비를 꺼냈다.
“에이. 그렇다고 겨우 드릴 하나로 여길 뚫자고?”
“크크. 이게 평범한 드릴로 보이냐?”
모자 쓴 늑대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드릴 뒷부분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위이이잉~
그러자 드릴의 앞부분에 연녹색 빛이 감돌더니, 곧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오.. 멋진데? 어디서 난 거야?”
“아무데나 함부로 만지지 마. 이건 위치 퀸님의 직속 과학자께서 만든 특제 머신! 볼텍스-V23 이라는 드릴이야. 내가 잭’O에게 비밀 정보를 얻었다고 하니까 이번에 반드시 비자금.. 아니, 군자금을 확보해야 한다며 특별히 맡겨주셨다고.”
모자 쓴 늑대는 이어 감탄스럽게 바라보는 다른 늑대들에게 양쪽 손잡이를 잡게 한 뒤, 중앙 손잡이를 직접 잡고 볼텍스-V23을 벽에 갖다붙였다.
드륵, 드르륵…
하지만 모자 쓴 늑대의 자신감과 달리 드릴은 얼마 들어가지 못한채 막혔고, 이후 세 늑대가 힘을 줘서 밀어도 같은 자리에서 공회전만 할 뿐이었다.
“뭐야. 거창하게 말하더니 아무것도 못하잖아!”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대체 무슨 놈의 벽이 이렇게 단단해!”
모자 쓴 늑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움브라에서 직접 본 볼텍스-V23의 위력은 대리석도 두부처럼 으깨던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콧김을 내뿜으며 본체에 달린 레버를 중간쯤으로 올렸다. 그러자 연녹색 불빛이 볼텍스-V23 전체에 퍼지며 드릴이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득드르르륵, 파가각! 드르르르륵, 파가가각!
한껏 강력해진 볼텍스-V23는 그제야 벽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렸고, 그동안 기계를 붙잡고 반동과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세 늑대는 점점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어이! 너무 힘들어서 이대론 안되겠어! 어떻게 좀 해줘봐!”
“큭… 안돼. 이미 권장 출력을..”
“야이! 지금 그런 게 문제야? 더는 못 버티겠다고!”
결국 참다 못한 늑대 한 마리가 버럭 화를 내며 일을 저질렀다. 방금 전 모자 쓴 늑대가 올린 레버를 끝까지 확 돌려 버린 것이었다.
위이이이잉~ 콰가가가각!!!
그러자 볼텍스-V23에서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밝은 연녹색 빛이 뿜어져나왔고, 그와 동시에 몇 배는 더 강렬해진 회전으로 벽을 빠르게 뚫고 지나갔다.
“돼.. 됐다! 해냈어!”
“어? 그런데 이거… 왜 안 꺼지지?”
벽을 뚫어냈다는 기쁨도 잠시.
모자 쓴 늑대는 곧바로 기계의 전원 버튼을 눌러 끄려고 했지만, 볼텍스-V23의 회전은 멈추지 않았다.
위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드릴은 오히려 모자 쓴 늑대의 의도와는 반대로 더욱 빠르게 가속하고 있었고, 그와 함께 주변 공기를 모두 떨리게 할 정도로 무서운 소리까지 함께 울려댔다.
“뭐야! 무슨 일이야!”
“모, 몰라! 니가 어떻게 좀 해봐!”
폭주한 볼텍스-V23가 뿜어내던 연녹색 빛은 서서히 붉은색으로 바뀌어가고 있었고, 그 빛은 기계에 대해 무지한 늑대들에게도 섬뜩한 느낌을 주기 충분했다.
“으아악! 이게 뭐야! 무서워!”
모자 쓴 늑대는 금새 새빨개진 볼텍스-V23을 뚫린 벽 안으로 황급히 집어던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콰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볼텍스-V23이 폭발했다.
그리고 현재.
“콜록 콜록.. 이봐. 다들 괜찮아?”
“휴우.. 이 벽 덕분에 살았네. 대체 얼마나 단단했던 거야?”
늑대 한 마리가 자신의 앞으로 떨어진 벽돌 몇 개를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폭발은 주변일대를 연기로 뒤덮을 만큼 강력했지만 브릭의 벽은 그 충격을 거의 다 받아내며 벽의 일부가 무너진 정도였다.
“끄으응. 하마터면 우리까지 날아갈뻔 했네.”
“너 때문이잖아. 저런 위험한 걸 함부로 막 건드리니까…”
“야야. 그런 소리 할 시간 없어. 방금 전 폭발로 귀찮은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얼른 보물을 챙겨서… 어?”
무너진 벽 앞에서 연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모자 쓴 늑대는,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브릭의 집 내부 풍경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황금알 거위의 보물 창고라더니… 겨우 저 집 하나 뿐이라고?”
“이럴 수가. 잭’O가 말해줬다는 정보가 거짓말이었다고?! 내, 내 돈…!”
모자 쓴 늑대는 커다란 두 눈을 굴리며 집 내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중앙에 있는 평범한 집을 제외하면, 나머지 부지는 넓은 마당과 사방에 펼쳐진 건축자재들 뿐이었다.
“우리가 속은거라고? 잠깐. 그럼… 저기 있는 놈은 뭐야?”
그때 한 늑대가 연기 사이로 드러난 창문 안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나머지 늑대들도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그들은 집 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브릭과 눈이 마주쳤다.
“히..히익.”
휘이이잉~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얼마 남지 않은 연기를 날려보낸 뒤, 브릭의 집에는 잠시 고요한 침묵이 이어졌다.
늑대들은 그때까지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아서였고, 브릭은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끼 돼지잖아? 쟤가 이 집 주인이라고?”
“흠…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이 난리를 쳤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그럼?”
“저 돼지라도 데려가야지. 어쨌든 이런 집에서 살고 있으면 뭔가 뜯어낼 구석이 있겠지.”
모자 쓴 늑대는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화했지만, 그들의 표정과 태도로 무슨 속셈인지 파악한 브릭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바로 그때.
“이 고약한 늑대들 같으니! 이 야밤에 민가를 약탈하다니. 해가 저물었다고 정의와 법도까지 저물었다고 생각하는것이냐!”
골목 어귀에서 어깨에 망아지를 태운 노인 기사가 큰 호통을 치며 나타났다.
“저건 또 뭐야. H.U.N.N.T인가?”
“야. 너는 아무리 여기 온지 얼마 안 되었다지만 저 인간도 몰라? 저 노인네가 바로 그…!”
“그래, 나는 돈키호테! 라만차의 기사다. 광명이 닿지 않은 곳에서 불의가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으니 내 어찌 방패를 들고 나타나지 않을쏘냐.”
그의 어깨에 탄 로시난테는 아직 졸린지 눈도 제대로 뜨고 있지 않았지만, 돈키호테는 형형한 눈빛을 번뜩이며 돌격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흥. 다 늙어빠진 노인네 주제에 허세는. 야, 빨리 처리하고 저 돼지나 챙겨가자고.”
돈키호테를 알아보지 못한 늑대는 다른 늑대 한 마리에게 손짓을 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좋지. 간만에 몸 좀 풀겠네. 크르르릉!”
“얼마든지 와 보거라! 사악한 늑대들아!”
다른 한 마리의 늑대도 그를 따라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며 뛰었고, 두 늑대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을 본 돈키호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방패를 움켜쥐고 주저없이 몸을 날렸다.
“그, 그만둬! 저 인간은 예전에 ‘그믐달 마녀회’가 만든 풍차 거인도 단번에 쓰러트렸..”
모자 쓴 늑대가 만류하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두마리의 늑대와 한 명의 인간이 충돌했다.
쿠웅!
“크아아악!”
돈키호테에게 달려들던 두 늑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괴성을 지르며 튕겨나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흥. 비열한 늑대들 같으니. 너희가 아무리 떼로 달려든다 하더라도 이 편력기사, 돈키호테의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물러나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돈키호테는 은은한 빛이 감도는 방패를 들고서 어깨를 한 바퀴 돌려 몸을 풀었다. 그리고 자리에 서 있는 모자 쓴 늑대를 바라보며 다시 돌진 자세를 취했다.
“어디 덤빌 테면 덤벼 보아라!”
“쳇. 어쩔 수 없지. 그럼 저 놈만이라도...”
모자 쓴 늑대는 돈키호테를 상대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 뒤, 집 안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브릭을 향해 몸을 돌렸다.
브릭은 무너진 벽을 넘어서 들어오는 늑대를 향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투웅-
브릭의 마당 안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모자 쓴 늑대는 하늘이 빙글 돈다는 감각을 느꼈다. 바닥 밑에 깔려있던 함정이 발동한 것이었다.
“쿠헐?”
모자쓴 늑대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기도 전에, 그의 몸은 곧이어 바닥에서 튀어나온 강철판에 의해 세차게 튕겨졌고, 그렇게 굴러간 곳에서는 또 새로운 함정이 발동했다.
쿠당탕탕! 태애앵!
사방에서 연쇄적으로 발동하는 함정에 이리저리 튕겨지고 두들겨 맞으며 늑대는 어느샌가 기절해 버렸고, 이후 몇 번의 함정을 더 거친 뒤에 담벼락 너머로 다시 날아가 철퍽 쓰러졌다.
“호오. 대단한 기계장치로군.”
모자 쓴 늑대를 처리하러 왔다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게 된 돈키호테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흥미로워했다.
그제야 돈키호테를 알아본 브릭은 마당 함정을 해제하고 밖으로 나와 돈키호테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님.”
그러자 돈키호테는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곤궁에 처한 이를 돕는 것은 기사의 사명이라네! 물론 자네라면 내가 없었어도 큰 어려움은 없었을 테지만 말일세.”
돈키호테는 스매시 레전드 경기장 내에서 스노우, 앨리스 등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곤 했기에 라이브러리 월드의 최고 건설사 ‘브릭건설’의 대표인 브릭을 금방 알아보았다.
“아, 아니에요. 아무리 이런저런 함정을 깔아놔도 계속 늑대가 몰려오면 언젠가는 뚫렸을 거에요..”
브릭은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렇게 브릭이 돈키호테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제보를 받고 온 자경단이 도착했다. 그들은 돈키호테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늑대들을 꽁꽁 묶어서 데려갔다.
“자, 그럼 나는 이만 떠나보겠네. 저 어스름 너머에 이 편력기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가 또 있을 것 같으니 말일세.”
돈키호테는 늘 그랬듯이 사건을 해결한 뒤 자리를 떠나려 했다. 브릭은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듯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치밀어오르는 궁금증이 있었다.
“자, 잠깐만요. 기사님.”
“으음? 내가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이 또 남았는가?”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기사님은 어떻게 늑대들에게 두려움을 갖지 않으실 수 있는거죠? 그 신비한 방패 덕분인가요?”
브릭의 질문에 돈키호테는 껄껄 웃은 뒤 입을 열었다.
“이 방패 말인가? 이건 아무 마법도 걸려있지 않은 평범한 방패라네. 여느 대장간에서나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아니, 그럼 어떻게 그런 방패로..”
“중요한 것은 장비가 아닐세. 바로 이 안에 담긴 것이지.”
돈키호테는 자신의 가슴팍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네? 그 안에 무슨 특별한 마법이라도..”
“내가 그런 것에 기댈 것 같은가? 이 가슴 안에 들어차있는 건 오로지 정의와 기사도 뿐일세.”
돈키호테의 말에 브릭은 믿기 힘들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답변이었기 때문이었다.
돈키호테는 브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 그게 다라는 얘길세. 자네도 스스로를 한 번 믿어 보게. 분명 멋진 기사가 될 수 있을테니!”
“네, 네?! 제가..요? 아니,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허허. 날 때부터 기사였던 이가 어디 있겠나. 당당히 가슴을 펴 보게나! 이 정도면 충분히 남을 도울 수 있는 재능일 테니까.”
돈키호테는 브릭이 세운 벽과 마당의 함정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리곤 브릭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돌려 떠났다.
브릭은 무너진 벽을 통해 보이는 돈키호테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서 방금 전 들은 말을 곱씹어 생각했다.
“휴. 아니야. 내 주제에 무슨..”
이어 브릭은 방금 전 돈키호테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브릭 자신이 그런 기세를 뽐내며 적에게 돌진하는 모습은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브릭은 어깨를 늘어트리며 방으로 들어온 뒤, 단단한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며칠 뒤.
브릭은 자신의 몸 만한 가방을 멘 채, 시놉 시티 거리를 걸으며 길게 적힌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초강력 접착제와 함정 고정틀은 샀고… 특제 드라이버는 재고가 들어오는대로 배달까지 해준다고 하니 신디에게 부탁해두면 되겠어.”
늑대들이 부순 벽은 날이 밝자마자 바로 수리했지만, 브릭은 그 정도로 안심할 수 없었다. 자신의 벽이 뚫릴수도 있다는 불안감. 그리고 언제든 늑대가 또 공격해올 수 있다는 공포감은 그 날부터 브릭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때문에 계속 벽을 보강하고 마당의 함정을 개량하기 위해 시놉 시티의 상점가까지 직접 나온 것이었다.
“으… 더 이상 벽의 두께를 늘리는건 도로를 침범하니까 안되겠네. 어쩔 수 없지. 슬슬 지하벙커도 고려를..”
쨍그랑! 우당탕탕!
설계도를 들고 중얼거리며 걷던 브릭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라, 저긴… 쓰리 베어즈?”
‘쓰리 베어즈’ 식당은 저렴한 가격에 서민 음식들을 팔아서 시놉 시티 주민들이 자주 애용하는 곳이었고, 밖을 거의 나가지 않는 브릭이 자주 배달을 시켜 먹는 곳이기도 했다.
놀란 브릭은 건너편 건물 벽에 몸을 붙이고, 가방을 내려서 몸을 숨긴 채 쓰리 베어즈 쪽을 살펴보았다.
“지금 나한테 일부러 이런 변변찮은 음식을 갖다준 거지?!”
쓰리 베어즈 안에는 보라색 장갑을 낀 흰색 머리의 청년, 라비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려찍자 우지끈 소리가 나며 탁자가 쪼개졌고, 그가 앉아 있었을 의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저, 저건… 라비잖아?’
브릭은 라비를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움브라 소속으로 스래시 레전드에 참가중인 라비는 강력한 힘과 그에 못지않은 포악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브릭은 깨진 창문과 도로에 널부러진 잔해들을 보며 그게 가게에서 날아온 의자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의자는 얼마나 세게 던져졌는지 창문을 뚫고 도로까지 날아갔을 뿐 아니라,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각이 나 있었다.
의자의 잔해였던 나무조각들을 보며 브릭은 전신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마찬가지로 늑대에게 박살이 난 우드 형의 집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 저희 가게의 오트밀은 모두에게 똑같은 맛으로 내놓는데요. 손님.”
라비가 소란을 피우자, 무신경하기로 유명한 쓰리 베어즈의 사장, 아빠 곰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빠곰의 말을 들은 라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들 자신이 받은 오트밀과 별반 차이가 없는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겨우 이걸 먹으려고 이렇게나 많이 몰린다고? 내가 산골에서 매일 먹던 떡보다도 맛이 없는데?“
라비는 대놓고 빈정거렸지만, 그에게 대꾸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라비가 저지르는 깽판은 시놉 시티에서 악당들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H.U.N.N.T가 투입되어도 제지가 안 될 정도였기에, 평범한 주민들 입장에선 얽히지 않는것이 상책이라 여겼졌다.
“흥. 다들 제대로 된 혀 뿐 아니라 배포도 없는 겁쟁이들 뿐이군.”
라비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이들을 둘러보곤 흥미가 없어져 몸을 돌렸다. 그때, 그를 붙잡는 소리가 있었다.
“어… 저기 손님?”
“뭐야? 나와 싸워볼 테냐?”
어쩐지 약간 기쁜듯이 몸을 돌린 라비의 앞에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한 손을 내밀고 있는 아빠곰이 있었다.
“식사를 하셨으면 음식값을 내고 가셔야죠.”
“뭐..? 크하하하!”
라비는 잠깐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 뒤, 곧 크게 폭소를 터트렸다.
움브라에 들어온 뒤, 라비는 시놉 시티의 어느 가게에서도 돈을 내본 적이 없었다.
다들 그를 두려워해서 아예 돈 달라는 소리를 하지 못했고, 이후에 움브라에 파견 나왔다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늑대가 대신 지불을 해주곤 하였기에 늘 유야무야 넘어가곤 하였다.
“음식은 별볼일 없어도 용기 하나는 가상하군. 좋아. 돈을 주지. 단, 잠시 후에도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으면 말이야!”
이어 라비는 아빠곰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그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으웅…?”
아빠곰은 그제야 눈을 조금 크게 뜨고 팔다리를 휘저었지만, 라비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몸을 돌려 건너편 골목 방향으로 아빠곰을 집어던졌다.
‘어, 어떡해! 이 쪽으로 온다..!’
브릭은 날아오는 아빠곰을 보며 당황했다. 라비가 집어던진 궤적과 속도로 예측해보면, 아빠곰은 어떻게 떨어지든 크게 다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침착하자.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브릭은 옆에 내려놓은 가방을 여는것과 동시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빠곰이 날아오는 건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엄청난 건축 경험이 담긴 브릭의 손은 그보다 더 빨랐다.
‘특수 경량판을 고무 막대로 엮고, 그 위에 초강력 접착제를… 아냐, 그건 경화 속도가 모자라. 스프링을 덧대고 이중 구조로 하는게 낫겠어!’
탁, 탁, 타타타탁!
순간적으로 브릭의 손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방에 들어가 필요한 재료들을 정확히 집어들었고, 바닥에는 순식간에 보호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우어…!”
그리고 완성과 거의 동시에, 아빠곰이 그 위에 떨어졌다.
터어엉~
브릭이 만든 급조 보호판은 형편없이 찌그러졌지만, 그 속에 파묻혔던 아빠곰은 상처하나 없이 멀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브릭 네가 만들어 준 거야? 고마워.”
아빠곰은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아녜요. 마침 도구들이 있어서…”
손을 내저으며 별거 아니었다고 말하려던 브릭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고 말았다. 쓰리 베어즈에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라비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넌 누구냐? 본 적 없는 재주가 있구나.”
“아, 아니 이건 그러니까… 그냥 건축..”
“그럼 어디 이것도 한 번 받아봐라..!”
성큼성큼 다가온 라비는 애초에 대화를 생각지 않았다는 태도로 장갑을 낀 손을 뒤로 크게 젖혔다. 그리고 그 손이 브릭을 향해 휘둘러지려는 찰나.
턱, 하는 소리와 함께 라비의 팔을 붙잡는 거대한 손이 있었다.
“이봐. 경기장 밖에서 날뛸 힘이 있으면 차라리 운동을 하는 게 어떤가.”
그는 바로 카이저였다.
동화 속 왕자 출신이었던 그는 왕위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으려 했고, 그 옷에 걸맞는 몸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세상의 어떤 옷보다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육체라는 것을 깨달았고, 직후 라이브러리 월드에 오게 되었다. 그 후론 현재 쓰리 베어즈 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카이저 GYM’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뭐야. 또 너냐?”
카이저를 본 라비는 지겹다는 말투와 함께 인상을 찌푸렸다. 그와는 스매시 레전드 경기장 안과 밖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힘 자랑을 할 거면 나한테 하지 그러나. 자랑이 될 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카이저의 말에 라비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라이브러리 월드에서 싸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라비였지만, 카이저의 괴력만큼은 만만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흥. 좋아. 이번에야말로 누가 우위에 있는지 알려줘야겠군.”
라비는 마침 잘 됐다는 듯 말하고는 몸을 돌려 카이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잡혀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흡…!”
그러자 라비의 팔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빠져나가려 하였지만, 그의 팔을 잡고 있는 카이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후후. 그간 운동을 게을리 한 건 아닌가? 힘이 좀 약해진 것 같은데.”
“시끄러. 이게 다 시원찮은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진작에 나처럼 프로틴을 섭취하지 그랬나. 그럼 더 두꺼운 상완이두근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카이저는 라비의 팔을 잡은 채로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당기며 버텼다. 그러자 라비는 마치 땅에 길게 뿌리를 내린 거목에 팔이 휘감긴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겨우 이 따위로… 힘만 무식하게 세 봤자..!”
“근육이야말로 지식의 원천이라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모르는가?”
“닥쳐라 이 근육 덩어리야!”
라비는 이를 악물며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둘의 손과 팔에서 서로의 힘이 부딪혔고, 그 여파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우우우웅
먼저 둘을 중심으로 땅이 조금씩 울리기 시작했고,  곧 그들의 발 주변으로 도로에 작은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금에서 쩌적 하는 소리가 나며 큰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둘은 한 순간에 뒤로 물러났다.
“후욱… 후욱…”
“휴우. 그동안 놀기만 하진 않았나 보군.”
라비는 팔에 선명하게 남은 카이저의 손자국을 보며 숨을 골랐고, 카이저도 손이 저리는지 반대편 손으로 세게 주무르며 말했다.
“어이, 덩치. 싸움은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란 걸 보여주마.”
라비는 카이저의 손을 힘들게 뿌리쳤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기에 곧장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카이저도 물러서지 않고 팔을 들어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때였다.
“상업 지구에서 허가받지 않은 싸움은 금지입니다!”
대로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제복을 입고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오고 있었다.
“자경단이군. 다들 훈련 루틴은 가르쳐준 대로 제대로 하고 있으려나?”
먼저 그들을 알아본 카이저가 말했다. 시놉 시티 자경단은 이야기 속 정의로운 성격을 가진 조연 및 엑스트라들로 구성된 단체로, H.U.N.N.T와 함께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자경단이 달려오자, 라비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곧 손을 내렸다.
“쳇. 위치퀸이 당분간 큰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만 안 했어도…”
라비는 못내 아쉽다는 듯이 카이저와 브릭을 번갈아 바라본 뒤, 그대로 몸을 돌려 모두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어… 손님! 돈은 내고 가셔야죠!”
그런 라비의 뒤로 아빠곰의 외침이 따라붙었지만, 라비는 대꾸하지 않고 거리 밖으로 사라졌다.
“흠. 생각보다 쉽게 빠져 나갔군. 지신근의 근육량이 줄었나? 팔운동 루틴을 강화해야겠어.”
카이저는 라비와의 충돌로 생긴 바닥의 흔적을 보며 턱을 매만졌다. 브릭은 조심스레 카이저의 옆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가, 감사합니다. 카이저 님.”
“음? 아아. 브릭 자네로군.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브릭을 알아본 카이저는 호쾌하게 웃으며 물었다.
“네. 덕분에…”
“다행이군. 그럼. 운동하는데 별 무리는 없겠어.”
“그렇.. 아니, 네? 우, 운동이요?”
“뭘 그리 놀라고 그러나. 자네는 건물을 짓는 게 특기지?”
카이저는 방금 전 브릭이 만든 보호판을 보며 말했다.
“네.. 이건 급하게 만든거라 별 거 아니지만…”
“토목과 건축. 이 모든 일의 기본은 모두 힘이 필요한 것 아니겠나. 자네는 기술에 비해 힘이 부족한 듯 하니, 그 몸에 근육을 가득 붙이기만 하면…”
“자, 잠깐만요. 제가 운동을 한다고 해서 카이저님처럼 될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브릭은 당황한 나머지 양 손을 저으며 말했다.
“와하하하. 그런 소리 말게나. 나는 한때 자네보다 더 나약해서 늘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으니 말일세.”
“네?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다네. 하지만 그런 몸으로 남기 싫어서 열심히 운동을 한 결과, 지금은 이렇게 멋진 육체를 가지게 되었지. 어떤가. 아름답지 않은가?”
카이저는 팔을 번쩍 들어 올려 근육을 보이는 포즈를 취했고, 브릭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자네도 할 수 있다네. 오늘부터 식단부터 조절하고, 내가 알려주는 루틴대로 꾸준히 운동만 하면…”
이후 카이저는 브릭에게 먹는 것과 운동법에 대한 방법을 상세히 전해 주었고, 엉겁결에 이야기를 듣게 된 브릭은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마무리로 프로틴을 대량으로 구매해 두면 기초 준비는 끝난 걸세. 어떤가. 이해가 되었나?”
“아, 네. 그…그렇지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게. 누구나 첫 발을 내딛는 것이 어렵지, 한 번 시작하고 몸에 익히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하나 쌓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말이야. 내 체육관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나?”
“네. 카이저 GYM이라면 바로 저 옆 블록의…”
“그래. 만약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 생각이 들거든, 바로 나를 찾아오게나. 우리 체육관의 문은 언제든 열려있으니 말일세.”
카이저는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더는 강요하지 않고 체육관으로 돌아갔다.
브릭은 그런 카이저의 뒷모습을 본 뒤, 천천히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야. 내가 운동을 해 봤자… 그 무서운 늑대들을 이길 수 있을리가 없잖아.”
브릭은 빠르게 고개를 저은 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방을 정리했다.
며칠 뒤
“휴. 이 정도면… 괜찮으려나?”
브릭은 방 한쪽 면을 꽉 채운 모니터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화면에는 브릭의 집 이곳 저곳이 나오고 있었는데, 모든 카메라는 서로의 사각이 없도록 몇 겹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화면에 비치고 있는 브릭의 집은 평범해 보였지만, 벽은 더 이상 강화시킬 수 없을 정도의 단단함을 가지고 있었고 마당에는 허가받지 않은 이가 함부로 통과할 수 없는 함정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었다.
이전보다 몇 배로 강화된 보안에 브릭이 한숨을 돌리고 거실로 나가는 순간.
“으아악!”
바깥에서 익숙한 남자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피터?!”
브릭이 황급히 방 안으로 되돌아가서 모니터를 보니, 마당 한쪽을 보여주는 화면 속엔 한 소년이 바닥에서 발동한 함정에 발목이 붙잡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는 브릭이 라이브러리 월드에서 사귀게 된 친구인 피터였다.
네버랜드에서 온 피터는 요정의 가루가 없어서 더 이상 날 수는 없었지만, 모험심과 선량한 성품은 여전하였기에 이렇게 자주 브릭의 집에 찾아오다가 함정에 빠지곤 하였다.
“우왓! 이게 뭐야. 대단해!”
함정에 붙잡힌 피터는 신기하다는 듯 소리쳤지만, 브릭은 화들짝 놀라 즉시 벽에 붙은 버튼을 눌러 함정을 관리하는 제어판을 꺼냈다.
브릭이 함정을 제어하는 사이, 마당 곳곳이 열리며 두꺼운 화살이 달린 발리스타, 발사대에 고정된 쇠구슬, 마치 공성 병기같은 형태로 매달려있는 통나무 등이 피터를 향해 조준되기 시작했다.
“어… 전엔 이런 것까진 없었는데..!
삐빅, 삑, 삑삑.
그리고 그것들이 발사되기 직전, 브릭의 손이 황급히 함정 해제 코드를 눌렀다.
슈우우웅…
그러자 발동 직전인 함정들은 다시 차곡차곡 원래 위치로 되돌아왔고, 피터 역시 무사히 바닥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피터! 놀러 올 때는 반드시 벨을 누르라니까!”
“아참참.. 그랬지. 하여튼 저런 도구는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니까.”
피터는 방금 전 일은 벌써 잊었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긴 함정이 늘 있다고 했잖아. 그렇게 막 들어오면 어떡해!”
“으윽. 맞아. 확실히 전보다 더 매서워지긴 했더라. 그래도 재미있었어!”
“이런 함정을 두고 재미라니. 하여튼 피터 너는 참…”
브릭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피터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브릭. 이 집은 마치 성 같잖아. 성에 들어오기 위해 벨이란 걸 누르고 기다리긴 싫다구. 차라리 성벽을 넘어오는게 낫지.”
“성?”
“응. 라이브러리 월드 어딘가엔 진짜 성이 있다고도 하지만… 이 근방엔 브릭 네 집만큼 멋진 곳이 없으니까.”
피터는 까마득하게 높게 솟은 담벼락을 보며 말했다.
‘성이라… 하긴, 이 정도면 집 담벼락이 아니라 성벽이라고 불러도 되겠네..’
브릭은 어느새 바깥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높아진 벽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처음엔 분명 안락한 집 하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안전에 대한 집착은 어느새 그의 집을 함정 가득한 성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피터. 그럼… 여기가 좋은 성으로 보여?”
“음... 분명 이곳이 멋지긴 한데...”
피터는 거대한 성벽을 한바퀴 쭉 돌아보며 잠깐 생각을 한 뒤,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성이라도, 역시 혼자서 지내면 외롭지 않아?”
피터의 말을 듣는 순간, 브릭은 갑자기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꿈꾸던 집은 이런 게 아니었어.’
세 형제가 언제든 찾아와도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 브릭이 꿈꾸던 집이란 분명 그런 곳이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집은 가볍게 들린 친구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할 뿐 아니라, 이 안에서 점점 더 나갈 마음이 없어지게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었다.
‘...결국 이 안에 있어봤자 평생 늑대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겠네.’
브릭은 그동안 늑대가 들어오지 못하는 벽을 쌓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난공불락의 성을 쌓는다 하더라도, 바깥에 늑대들이 존재하는 이상 늑대에 대한 공포심은 늘 벽 안에서 자신과 함께할 것이었다.
“뭐야. 브릭. 오늘따라 왜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야. 혹시 내가 너무 자주 찾아와서 화났어?”
“아, 아니야. 피터. 그런 게 아니라… 혹시 너는 우리 집에 오는 게 무섭지 않아? 매번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모를텐데...”
브릭의 말에 피터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받았다.
“에이. 당연히 뭐가 있을 줄 모르니까 재밌는거지. 모르는 게 무섭다고 무조건 피하기만 하면 모험을 어떻게 하겠어?”
피터는 자신의 갈고리 칼을 들어올리며 당당히 말했다. 브릭은 그런 피터를 보자 팍 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나도 이렇게 숨기만 할 게 아니야. 늑대가 무섭지 않으려면, 직접 늑대를 잡아야만 하는 거였어.’
이후 브릭의 표정은 결연하게 바뀌었고, 양 손에는 힘이 불끈 들어갔다.
“괜찮아 브릭? 불편하면 난 그만 갈까?”
피터는 그런 브릭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브릭은 그제야 고개를 든 뒤, 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아니야. 피터. 우리 오늘은 밖으로 나가서 놀래?”
“어? 정말이야? 와, 좋지! 무슨 일이야. 네가 집밖으로 나가자고 하고!”
“응. 바깥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났거든.”
브릭은 집 벽장을 열고 포장지에 쌓인 길죽한 물건을 꺼냈다. 이어 7D라고 적힌 포장지를 벗겨내자,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삽이 나타났다.
“좋아. 이제 나가자 피터.”
빗장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브릭은 잠시 몸을 떨었지만, 곧 그의 머리 위로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