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해라, 리틀 존.”
“두목도.”
리틀 존은 로빈의 손을 마주 잡았다.
“미안해, 이럴 때일수록 도와줘야 하는데…”
“어쩔 수 없지. 더 이상 여기에는 우리 ‘유쾌한 동료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리틀 존의 말에, 로빈은 그저 그렇게 대답했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에 아쉬움이 섞여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두목, 역시…”
“가, 빨리. 너까지 딸려 있으면 나 먹고 살기도 힘들어.”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리틀 존은 로빈의 속내를 알 수 있었지만, 로빈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훼훼 저을 뿐이었다. 그 행동에, 결국 리틀 존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미련이 남는다는 듯 리틀 존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결국은 거리의 인파들에 섞여버렸다.
로빈은 평범한 사람에 비해 머리 하나는 큰 리틀 존의 등을 더는 쫓을 수 없을 때까지 바라보다, 마침내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유쾌한 동료들’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군.
리틀 존은 가장 처음부터 로빈과 함께 의적단 ‘유쾌한 동료들’을 꾸렸던 동료였다. 그런 그도 결국에는 떠나버렸다. 로빈은 서운하다거나 배신감을 느낀다거나 하진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쓸쓸함은 느껴졌다.
로빈은 거리의 수많은 인파와, 그 위로 펼쳐진 높은 건물들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도, 그 안에 섞인 말하는 동물이나 처음 보는 생물들도,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들어올려도 까마득한 돌로 된 건물도, 로빈에게는 모두 낯선 것들이었다.
로빈은 눈을 감고 익숙한 풍경을 떠올렸다. 높다란 나무들이 가득한 숲, 함께 하는 익숙한 동료들, 그리고 그 사이의 멋진 자신… 아, 그리운 셔우드 숲.
설령 그곳이 이야기 속이었다고 해도, 로빈은 자신이 있던 곳을 그리워했다.
로빈은 한때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셔우드 숲에서 자신의 부하이자 동료들인 ‘유쾌한 동료들’과 함께, 비리를 저지르는 지방관이나 나쁜 부자들에게서 훔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유명한 의적. 로빈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악당들은 벌벌 떨었으며, 선량한 이들은 찬양하며 환호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런 즐겁고도 충실한 의적 생활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예고도 없이 셔우드 숲은 사라졌다. 로빈과 ‘유쾌한 동료들’은 자신들이 한 순간에 평생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낯선 땅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혼란이 뒤따랐다. 어떤 사악한 마녀의 마법이 아닐까? 숲의 요정들이 장난을 친 건 아닐까? 얼마 전 부패한 부자의 집에서 훔쳐온 장물이 저주받았던 건 아닐까?
하지만 정답은 그들 중에 없었다.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동료들과 주변을 탐색하던 로빈은 두 발로 걷고 말하는 토끼를 발견했고, 그에게 설명을 듣게 됐다.
로빈과 동료들이 도착한 곳은 라이브러리 월드. 모든 이야기가 모이는 세계였다.
토끼의 설명에도 로빈과 동료들은 자신들이 이야기 속의 인물이며, 그 이야기에서 튕겨나와 라이브러리 월드로 온 것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라이브러리 월드라는 새로운 세상과, 그곳에서 만나는 낯선 인물들을 보면서 로빈은 그것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라이브러리 월드는 그리 나쁜 세상은 아니었다. 로빈과 동료들의 이야기보다 과학도 기술도 발전되었고, 생활도 편리했다. 왕은 없었지만 라이브러리 월드를 관리하는 이들이 있었고, 부패한 관리나 탐욕스러운 부자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자신들이 온 것처럼 갑자기 라이브러리 월드로 오거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라이브러리 월드의 이변’, 그리고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악당들의 모임 ‘움브라’ 같은 불안은 있었지만, 종합적으로 생각하면 로빈의 이야기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로빈과 동료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로빈과 ‘유쾌한 동료들’은 의적. 부패한 관리나 부자들과 맞서 싸우는 존재. 세상이 혼란하기 때문에 필요로 여겨지고 그 존재가 인정받는 집단이었다. 하지만 라이브러리 월드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악당들은 있지만 그들과 맞서는 집단도 이미 있었고, 로빈이 주로 맞섰던 부패한 관리, 사악한 부자들은 찾기 힘들었다.
라이브러리 월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야기 속과 마찬가지로 돈이 필요했다.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 본거지인 셔우드 숲의 기지도 잃어버린 로빈과 동료들은, 자신들이 하던 의적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라이브러리 월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 함께 라이브러리 월드의 중심인 시놉 시티로 와서, 여러 일거리를 찾아 ‘유쾌한 동료들’ 의적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 의적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의적단이 유지될 수는 없었고, 의적단의 동료들은 하나 하나 자신이 살 길을 찾아갔다. 각자 직장을 구하고 집을 구해서. 로빈은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직에는 여러 방식이 있다. 이전처럼 한 집에서 살지는 않지만, 한 집에 살아야만 가족은 아닐 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찾아가고, 연락하고, 그런 변화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으니까.
“하아…”
깊고 긴 한숨. 마음을 다잡고 돌아선 로빈의 앞에, 어린 꼬마들이 있었다.
“로빈! 리틀 존도 떠난 거야?”
“다신 안 오는 거야? 이제 목마 안 태워줘?”
“로빈도 떠나는 건 아니지? 그렇지?”
시끄럽게 재잘거리며 로빈에게 달라 붙는 아이들. 지치고 피곤했던 로빈은 아이들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자신을 동경하고 따르는 아이들이니까. 로빈은 찌푸린 얼굴을 애써 펴려 노력하며 아이들을 향해 웃어보였다.
“하하, 아니란다 얘들아! 리틀 존은 이사를 가는 것뿐이지 계속 우리 동료야!”
“거짓말! 스튜들리도 앨런도 다들 안 돌아오잖아!”
“정말 ‘유쾌한 동료들’은 해산이야? 응?”
로빈의 상쾌한 변명에도 아이들은 안심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더욱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로빈은 점점 올라오는 짜증을 숨기려 노력하며, 아이들과 함께 지금의 집으로 향했다. 시놉 시티 중하층에 위치한 낡은 건물로.
건물 안에는 이제 로빈 외에는 아이들과 노인들만이 남아있었다.
한때, ‘유쾌한 동료들’에는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로빈과 함께 의적으로 활동하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맞서 싸우는 지방관이나 귀족, 부자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도망친 이들도 많았다. 로빈은 그들을 내치지 못했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것으로 약한 이들을 먹여 살렸다. 그것은 이야기를 떠나 라이브러리 월드에 온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
각자의 살길을 찾아 ‘유쾌한 동료들’이 떠나간 이상, 남아있는 아이들과 노인들을 보살필 수 있는 것은 로빈 정도였다. 로빈은 차마 그들을 버려두고 떠날 수 없었다. 자신을 믿고 따라온 이들이니까. 하지만 그들을 이전처럼 잘 보살필 자신도 없었다.
로빈은 자신의 활솜씨에 여전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재능은 라이브러리 월드, 더욱이 시놉 시티에서는 큰 도움이 되는 재능이 아니었다. 악당들을 물리치는 이야기 속의 ‘지나가던’ 이들이 모인 H.U.N.N.T는 자격 조건이 안 되어 들어갈 수 없었고, 애당초 그들은 자원봉사에 가깝기에 일을 해도 돈을 벌기는 힘들었다.
시놉 시티 자경단도 있었지만 로빈이 원하는, 가족들을 먹여살릴 보수는 얻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악당들의 집단인 ‘움브라’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가진 재능은 싸우는 재능 정도지만, 로빈은 아직 악에 물들고 싶진 않았다.
“하아…”
웃고 떠드는 아이들과, 마치 손주들을 보듯 웃고 있는 노인들. 로빈은 저 웃음을 지키고 싶었다. 떠나간 모두를 원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부자를 털어 약한 자를 지키는 명분 아래 모인 이들,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다면 떠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로빈은 그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저 웃음을 지키고 싶지만,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고 싶지 않다. 나는 로빈, 셔우드 숲의 의적, ‘유쾌한 동료들’의 두목. 가난한 이에게 베푸는 정의로운 자. 이야기 속의 인물이든 아니든, 그 사실만은 변할 수 없었다.
로빈은 각오를 굳혔다.
라이브러리 월드에는 왕과 귀족은 없었지만, 부자들은 있었다. 그들은 왕이나 귀족 대신 ‘사장’이나 ‘대표’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다층으로 이루어진 시놉 시티의 상층에 성 대신 높은 빌딩을 짓고, 아래층에서는 굶주리는 동안 자산을 모으고 있었다.
뭐, 로빈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들었다는 거다.
이야기 속에서도, 왕과 귀족과 부자들에 맞서 싸우는 로빈과 동료들을 잡으러 왔었다. 라이브러리 월드도 마찬가지일테고, 더 나아가 ‘움브라’ 같은 악당이라고 불리게 될지도 모른다. 모르는 세상이기에 이야기 속에서처럼 의적이라며 활동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위험을 동료들과 나눌 수 없기에, 로빈은 혼자가 될 때를 기다려왔다. 모두와 함께하면 더 수월할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그들은 분명 자신을 따라오겠지만, 로빈은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낯선 땅에서 악당이라는 멸시까지 듣게 한다면 두목 실격이니까.
어쩌면, 일이 잘 풀려서 로빈의 명성이 다시 라이브러리 월드에 퍼져나가면, 다시금 돌아온 동료들과 ‘유쾌한 동료들’을 재결성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빈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로군…”
밤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낮처럼 빛나는, 높디 높은 빌딩을 올려보며 로빈은 중얼거렸다.
7D 코퍼레이션. 줄여서 7D. 라이브러리 월드에서 가장 거대한 회사였다.
‘라이브러리 월드의 이변’이 일어날 때쯤 나타나, 갑자기 여러 신기한 물건들을 만들어 팔고 어디서 났는지 모를 돈으로 각종 회사들을 병합하고, 시놉 시티를 거대한 복층의 미래 도시로 바꾸고, 이제는 사실상 라이브러리 월드의 경제를 지배하는 곳.
이변으로 갑자기 라이브러리 월드로 소환된 이들에게 집이나 일거리를 제공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여러 복지를 지원하는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로빈이 들은 정보에 의하면 그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의적의 표적으로 삼을 곳을 찾는 로빈에게 접근한 어떤 기계인간에 의하면, 사실 7D는 악덕기업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 척 하는 것은 그저 겉모습 뿐이고, 속으로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나쁜 놈들이라는 모양이었다.
정보비라면서 돈을 제법 요구하긴 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의적 로빈의 복귀 상대로 딱이다. 로빈은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이야기 속에서는 보지 못한 높게 솟은 건물. 로빈의 눈에는 마치 높다란 탑이나 성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로빈은 걱정하지 않았다. 어떤 탑이든 성이든 반드시 구멍은 있다는 걸 로빈은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
사람이 드나드는 정문만이 입구는 아니다. 물이 드나드는 수로, 물자가 드나드는 창고, 운이 좋으면 비상상황에 탈출할 수 있는 출구까지. 도움을 바랄 수 없는 로빈은 이미 시간이 날 때마다 7D 타워를 방문했고, 감시가 소홀한 구멍을 찾아냈다.
이미 밤이 깊었기에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고, 건물 역시 인파가 없었다. 하지만 밖에서 봤을 때 켜진 창문의 불들이나, 건물 안의 통로를 순찰하는 사람들을 통해 로빈은 여전히 적지 않은 이가 건물 안에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을 이 시간까지 부려먹다니… 역시 7D는 악덕기업이군.’
로빈은 기계인간이 들려준 정보가 거짓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거기에 로빈의 의심을 부추기는 것이 또 있었다. 복도마다 홀마다 설치된 카메라나 각종 탐지장치. 아직 라이브러리 월드의 과학에 적응하지 못한 로빈이었지만, 그것들이 대충 어떤 역할을 하고 능력을 가진지는 알 수 있었다.
경험상, 이런 식으로 남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녀석들은 뒤가 구린 녀석들이다. 로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본능을 따라 경험을 따라 여러 장치들을 피해 점점 더 7D 타위의 높은 곳으로, 더욱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는 곳으로 향했다.
로빈은 자신이 이미 누군가에게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방대한 7D 타워를 돌아다니며, 로빈은 보물창고를 찾아 헤맸다. 깊은 곳일수록, 경비가 삼엄할 수록 그곳에 보물을 숨겨둔 것을 알기에, 로빈은 어느새 정신을 차리자 발 한 걸음도 제대로 내딛기 힘든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긴 보물창고는 아닌 것 같은데?’
벽에는 투명한, 유리로 된 것 같은 원통의 수납함 안에 온갖 무기들이나 처음 보는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유리는 마법의 유리인지 글씨나 그림 같은 것이 외부에 비추듯 은은하게 떠올라 있었다. 아직 라이브러리 월드의 과학기술에 익숙하지 못한 로빈은 그것들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여긴 무기고인 걸까? 하지만 평범한 무기고라면, 이런 마법의 유리 보관함 안에 넣어둘리 없다. 그렇다면 뭔가 가치가 있는 물건이기에 넣어둔 것. 로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이런 녀석들은 꼭 신기한 도구들을 모아두곤 했지. 이것들도 마법의 무기인 거야!’
의외로 로빈의 생각은 맞았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고, 이곳에 있는 무기들은 7D의 기술력이 집약된 최첨단의 시험 무기들이었으니까.
마침 잘 됐어. 로빈은 생각했다. 원래 목표는 아니지만, 마법의 무기를 훔친다면 악덕기업 7D에게 한방 먹여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마침 로빈에게는 활이 필요했다. 셔우드 숲에서부터 함께 해온 활이 있긴 하지만, 이상한 세계인 라이브러리 월드에서는 더 좋은 활이 있다면 좋을 테니까.
문제는, 보관함을 여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보관함은 입구 없이 마법의 유리 통짜로 되어 있어 로빈으로서는 열 수 없었다. 직감적으로 마법의 유리 위에 떠오른 글자나 그림 중 무언가가 잠금을 해제하는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함부러 눌렀다가는 자신이 여기 있다고 알리는 꼴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한다… 그냥 내려쳐서 깨버려?’
로빈은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멋들어진 의적이 할 방법이 아니다. 거기에 유리를 깼다가 경보가 울리거나 하면 더욱 곤란하다.
포기하자니 아깝고, 챙기자니 어려운 곤란한 상황. 그런 상황과 여기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들어왔다는 것, 그리고 오랜만에 현장에 돌아와 무뎌진 감과 자만감이 로빈의 긴장을 풀었다. 저벅거리는 두 쌍의 발걸음이 복도에서 들려오는 것을, 로빈은 눈치 채지 못했다.
“거기 누구냐!”
두 명의 7D 경비원이 문을 열고 총을 겨누는 순간, 로빈은 자신의 행동을 뒤늦게 후회했다. 이런 멍청이 같으니. 좋은 활을 봤다고 넋이 나가서는. 생각해보면 이럴 때 뒤를 봐주고 자신을 말려줄 동료 역시 없었다. 로빈의 머릿속에는 사악한 악덕기업 7D에 잡혀가, 끔찍한 취조를 당하고, 지하 노역장에서 영원히 곡괭이질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 테스트는 종료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로빈이 양 손을 뻗은 채 7D의 경비원들을 달래려 하는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빈은 물론이고 두 경비원 역시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런 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소년이었다.
기껏해야 10대 소년. 하얀색 옷을 입고 인상적인 마스크를 머리에 쓴, 조금 창백한 기운은 있지만 잘생긴 소년이었다. 하지만 로빈은 어째서 이런 소년이 이런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스노우 대표님?”
경비원의 그 말을 들을 때까지는.
스노우. 그러고 보니 로빈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신문이니 뉴스니 하는 것에서 이미 몇 번이나 들어본 이름이니까. 거대기업 7D의 대표이자 라이브러리 월드 최고의 부호. 아직 젊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로빈은 어디까지나 ‘젊다’는 표현이 으레 의미하는 나이일 거라고만 생각했지 이런 10대 소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농담이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자신을 향해 총이 겨눠진 상태에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로빈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가 진짜 중요한 창고에 오긴 한 모양이야. 하긴 마법의 무기와 마법의 보관함이 가득한 곳이니, 그런 곳이 털리면 대표가 직접 올 지도 모르지. 이제 직접 나를 심문하고 지하 노역장으로 끌고갈까.
“이런, 소개가 늦었군요. 이 분은 로빈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들려온 스노우의 말은 또다시 로빈의 기대를 벗어났다.
“예? 도둑이… 아니었습니까? 신개발 무기를 훔치러 온줄…”
경비원들은 의아하다는 듯 스노우에게 물었다. 로빈은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서늘하게 가슴에 남았다.
‘이 꼬맹이, 내 이름은 어떻게 안 거지?’
스노우는 웃는 얼굴로 경비원들에게 말했다.
“아뇨, 이 분은 우리 7D 보안 본부의 일원입니다. 경비 상태 점검을 위해, 침입 상황을 부탁드렸죠.”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우선 이건 찬스다. 그렇게 생각한 로빈은 히쭉 웃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네네, 맞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구 그랬군요!”
“대표님께서도 차암~”
환하고 사람 좋게 웃는 로빈, 그 옆에서 인자한 웃음을 띈 채 자신들을 바라보는 스노우. 그 모습에 경비원들은 의심을 거두고는 로빈과 인사를 나눴다. 로빈은 자신이 연기하는 배역에 조금 더 몰입하기로 했다.
“여러분도 열심히 노력했겠지만, 아쉽게도 보안 상태가 그리 좋진 않네요. 제가 여기까지 오기 전에 막을 수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 그렇죠. 이거 부끄럽네요…”
“이번에야 제가 경비 상태 점검을 위해 얌전히 들어와서 그렇지, 나쁜 마음을 먹고 들어온 악당들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폭탄을 설치한다든가, 돈을 훔쳐간다든가, 여기 있는 무기들을 훔쳐간다든가 하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상황에 맞춰서 경비원들을 추궁하는 로빈과, 범인을 잡아서 실수를 만회하려 했는데 오히려 그 범인에게 추궁당하는 경비원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규탄의 장으로 변해가던 순간, 스노우는 로빈과 경비원들의 어깨를 격려하듯 치며 말했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 7D의 경비 상태를 점검하는 목적이니까요. 로빈 씨가 문제점을 잘 찾아주셨으니, 이제 같은 실수는 반복되지 않을 겁니다. 저도 여러분이 이런 늦은 시간까지 경비를 서느라 수고하신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문제점을 로빈 씨가 지적해주신다면, 더욱 철저한 보안이 가능하겠죠. 그렇죠?”
“대표님…”
하필이면 대표인 스노우의 앞에서 상황을 추궁당하던 경비원들은, 자상한 스노우의 말에 감동한듯 목소리를 떨었다. 로빈 역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강하게 나섰지만, 경비 상태가 안 좋은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혼내는 모양새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기에 그쯤 하기로 했다.
“그럼 계속해서 경비를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저는 로빈 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눠야 해서요. 자리를 비워주실 수 있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대표님! 순찰로 복귀하겠습니다!”
친절한 스노우의 말에, 경비원들은 경례를 올리고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웃는 얼굴로 그들을 배웅하던 로빈은 이제 진짜 문제와 마주하게 됐다.
“허,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스노우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신경 쓰였던 문제. 로빈은 그곳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로빈이 7D를 습격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그걸 드러낸 적은 없다. 그 기계인간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게 전부고, 그 뒤에 7D 타워로 몇 번이나 정찰은 나갔지만 직접 접촉한 적은 없었다. 그야 로빈은 자신이 유명하니 누군가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라이브러리 월드에서의 생활은 로빈의 그런 만족감을 꺾어버린지 오래였다.
라이브러리 월드에는 수많은 이야기에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모인다. 로빈 정도면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긴 했지만, 그 수없는 시놉 시티의 주민들 사이에서 누구나 알아보는 존재까지는 아니었다.
로빈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지만, 로빈이 라이브러리 월드 굴지의 기업 7D에 침입하기로 결정한 것에는 그에 대한 실망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노우는 로빈의 질문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미소는 방금 전 경비원들에게 보여줬던 미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 방법이 있죠. 정의를 사랑하는 의적 출신이셨지만, 현재는 꽤나 궁핍하신 상황이죠?”
스노우의 손짓에, 허공에 사각형의 창이 떠올랐다. 그 창에는 로빈의 사진, ‘유쾌한 동료들’의 사진은 물론이고 로빈이 사는 곳의 사진들까지 찍혀 있었다. 본 적 없는 기술을 마법으로 생각한 것과,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에 로빈은 비명을 질렀다.
“뭐… 숨길 것도 없겠군요.”
겨우 마음을 다스리고, 로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악덕기업이란 소문이 들리길래 털어보려 왔죠. 근데, 왜 둘러대준 겁니까?”
사실, 악덕기업이라는 소문은 이제 진짜인지 아닌지 로빈은 알 수 없었다. 들었던 소문의 이미지와, 지금 눈앞에 있는 대표 스노우의 이미지는 전혀 달랐으니까.
로빈은 지금까지 많은 악당들을 만나봤다. 그의 숙적이었던 주장관이며, 부패한 성직자나 심지어 왕까지. 개중에는 이제는 ‘유쾌한 동료들’에 들어온, 아니 소속되었던 이들도 있었다. 그 경험들로 로빈은 상대를 보면 그가 어떤 자인지 대략은 알 수 있었다.
스노우는 달랐다. 사람 좋은 미소에는 타인을 기만하는 기색은 없었고, 아직 어리지만 굳은 심지를 가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 안에는 어떠한 사명감이나 죄책감도 서려있는 것 같았지만, 로빈은 그런 사정까지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스노우의 행동을 설명해주지는 못했다. 악당이든, 착한 이든, 자신의 집에, 아니 성에 침입한 자를 둘러댈 이유가 있을까?
“저희 7D에 정식으로 입사를 부탁드립니다.”
“...지금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그렇기에 로빈은 스노우의 말에 다시금 놀랐다. 어째 이 꼬맹이가 입을 열 때마다 놀라게 되는 것 같군. 로빈이 당황하며 되묻는 말에 스노우는 대답했다.
“우선, 우리 7D는 악덕 기업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같이 정의로운 사람이 필요해요.”
스노우는 이전부터 로빈을 지켜봤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스노우는 로빈에게 자신과 7D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야기의 줄거리, ‘운명’에 의해 누나와 싸우게 된 것, 라이브러리 월드로 오게 된 것, 누나, 위치 퀸이 악당들을 모아 ‘움브라’를 창설해 라이브러리 월드를 위협하는 것과 그걸 막기 위해 7D를 세운 것.
“당신 누나가 위치 퀸이라고요?”
“아직은 비밀이니 알고만 계셔 주세요. 머지 않아 알려지게 되겠지만... “
스노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로빈은 스노우의 그 반응에서, 스노우를 봤을 때 느꼈던 사명감과 죄책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스노우는 표정을 다시 진지하게 하며 말했다.
“우리 7D의 목적은 ‘움브라’에 맞서 라이브러리 월드를 지키고, ‘라이브러리 월드의 이변’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서는 많은 자원과 큰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렇듯 대기업으로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었죠. 라이브러리 월드에서 조직을 꾸리고 힘을 키우려면 회사가 제일 적절하니까요.”
스노우는 조금 후회하듯 말했다.
“물론, 로빈 씨가 들은 소문이 모두 헛소문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7D를 키우는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이나, 소외된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르죠. 그렇지만 그것들은 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이브러리 월드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지만…”
로빈은 스노우의 행동이 단순한 위선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 행동이 7D와 스노우에 대한 마지막 의심을 없앴다. 그 표정은 한때 로빈 역시 가졌던 고민을 할 때 나오는 표정이니까.
의적으로서 로빈은 악한 이들의 재물을 훔쳐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도왔다고 자부했지만, 로빈에게도 죄책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재물을 훔치려 맞서 싸운 경비병이니, 자신들을 체포하러 온 병사들이니 하는 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선량한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과 싸워 쓰러트리는 것은 과거의 로빈에게는 번민해야할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였고, 그럴 때 로빈은 스노우와 같은 표정을 지었던 것을 기억했다. 이제는 그런 일에 신경 쓰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무뎌졌지만.
역시, 대기업의 대표니 뭐니 해도 아직 꼬맹이군. 로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로빈의 속마음을 읽을 수 없는 스노우는 마음을 다잡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 7D는 움브라에 맞서기 위한 사람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과, 악에 맞설 용기와 실력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하죠. 그렇기에 저는 로빈 씨가 라이브러리 월드로 왔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스노우는 의적 활동을 할 수 없는 로빈이 자신을, 정확히는 7D를 목표로 노릴 거라고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7D 타워 주변을 몇 번이나 드나드는 것이 확인됐고, 그가 타워에 들어설 때부터 지켜봤다. 스노우는 솔직히 로빈의 실력에 감탄했다.
“저 역시 위치 퀸과 움브라와 맞서 싸우며 잠입이나 침투를 할 일도 많았습니다만, 로빈 씨는 역시 다르더군요. 처음 보는 기술의 감시 장치가 몇 겹이나 있는데, 로빈 씨는 어려움 없이 이곳까지 오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당신에게 정식으로 입사를 부탁드리기는 충분하죠.”
“요컨대, 시험에 합격했다?”
빈정대는 로빈의 말에도 스노우는 동요 없이 말했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시다면 그래도 좋습니다.”
스노우의 침착한 태도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으로 보였다. 로빈은 이 모든 것이 오래 전부터 스노우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입사 선물로 이 활도 드리죠.”
스노우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함께 로빈이 방금 전까지 어떻게 열면 좋을까 고민하던 마법의 유리 보관함이 열렸다. 스노우는 그 안에서 활을 꺼내 로빈에게 건네줬다.
“이건 우리 7D의 기술력을 동원해서 만들던 시제품 활입니다. 전문기술을 늘어놓아도 잘 이해 못 하실 테니… 빛으로 만든 화살을 쏠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로빈은 그제야 자신이 침투한 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보물창고도, 마법의 무기를 보관한 무기고도 아니었다. 7D가 자신은 모르는 어떠한 기술들을 이용해 무기들을 개발하고 제작하고 연구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스노우는 생각에 멍해 있는 로빈의 손에 활을 쥐어주며 말했다.
“시위를 당긴다고 생각하시고 당기면, 시위와 화살이 만들어질 겁니다. 시위의 장력은 여길 통해서 변경할 수 있고요. 로빈 씨에게 잘 맞는지 시험해보시죠.”
스노우가 허공에 뜬 창을 조작하자, 연구실 반대편 벽에 표적이 떠올랐다. 로빈은 이미 활을 쥐면서, 그 감촉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스노우의 말대로 시위를 당긴다고 생각하고 팔을 움직이자, 빛으로 된 시위와 화살이 로빈의 손에 생겨났다. 분명 빛에 불과한데도, 로빈은 진짜 활의 시위를 당기는 것 같은 장력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감촉에 위화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로빈이 시위를 놓자, 화살은 표적의 정중앙에 정확히 명중했다. 마치 폭발하는 것 같이 표적에 타격력을 그대로 입히고, 화살은 사라졌다. 로빈이 손에 쥔 활을 바라보는 사이, 스노우는 만족스럽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역시 제일의 명사수시군요. 화살은 계속해서 보충될테니, 편하게 쏘실 수 있을 겁니다. 일반적인 활로는 불가능한 연사도 가능하실 거예요. 연구하던 연구원들은 못 했지만, 로빈 씨라면 가능할 겁니다. 이론상은 그러니까요.”
“이건…”
로빈은 스노우에게 말하려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으니까.
스노우가 건네준 활은 로빈의 손에 딱 맞았고, 그 장력 역시 로빈이 쓰던 활과 똑같았다. 로빈은 스노우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자신이 라이브러리 월드로 넘어올 때부터 주목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런 거겠지.
“뭐, 선물로 준다면 감사히 받죠. 아까 경비원들에게 걸렸을 때 둘러대준 것도 고맙고, 하는 김에 높게 평가해준 것도 고맙다고 해둘게요. 하지만 7D에 입사하라는 거, 그건 좀 아닌데.”
로빈은 활은 순순히 어깨에 메면서도, 7D에 입사하라는, 바꿔 말해서 부하가 되라는 스노우의 말에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로빈은 남의 밑에 들어갈 생각도 없었고, 스스로 그럴 성격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로빈은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고, 남들을 이끄는 걸 좋아하고, 무엇보다 인정 받고 존경받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현재, 라이브러리 월드를 싫어했고. 스노우가 자신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준비해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바꿔 말하면 언제든지 로빈을 협박하거나 위협할 수 있다는 뜻임에도. 그 점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으며, 그럼에도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로빈은 따지고 보면 천성이 반골이었다.
“로빈 씨는 일자리를 찾고 계시지 않나요? 남아있는 동료 분들의 생활을 돌보기 위해서요.”
스노우의 말에 로빈은 코웃음을 쳤다.
“아, 뭐 그렇긴 하죠. 왜요, 절 매수할 생각입니까?”
“매수는 아니지만 좋은 조건으로 영입하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이 조건은 어떨까요?”
로빈은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 다시금 코웃음을 치며 스노우를 바라봤다. 스노우는 허공의 창에 뭔가를 입력하고 로빈에게 보여줬다. 로빈은 처음에는 웃고, 신나는 미래를 상상한 듯 그 입꼬리가 더욱 길어지다가, 아차 싶어서 코웃음을 치려 했으나, 결국에는 실실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로빈 딴에는 ‘아이고 뭐 겨우 이 정도로’ 라는 의미로 짓는 실실거림, 이고 싶은 웃음이이었다.
“여, 연봉이 이 정도면 확실히 매력적이긴 하네요. 왜 7D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지 잘 알겠어요. 하지만 겨우 이정도로…”
“월급을 제안드린 건데요.”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로빈은 스노우의 양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벌써 그게… 언제적 일이더라…?’
사람에게는 ‘왜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더라?’ 같은 고민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회의가 들었을 때, 정신이 너무 피로하여 이 피곤의 원인을 찾고자 할 때, 왜 내가 이런 처지에 놓였는지 스스로에 대해 회의감이 들 때, 기타 등등.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만드는 무한히 반복되는 것 같은 일의 사이, 자아가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내놓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로빈은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덕분에 희미해가던 의식을 붙잡을 수 있었으니까.
준비해뒀던 캔을 딴다. 이것도 빌어먹을 7D의 물건이라는 사실이 생각 났지만,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에 상표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 안에 털어넣었다. 탄산이 텅 비고 지친 내장을 두들기는 것 같지만, 덕분에 잠에 빠지려는 의식이 조금은 돌아왔다.
로빈도 그게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은 알고 있었지만.
로빈이 7D에 입사하고 제법 시간이 지났다.
정식으로 7D에 입사한 로빈은 보안 담당 요원으로서 제법 높은 위치에 올랐다. 낙하산이라고 비난을 받기에는 로빈은 원래 유명했으며, 그 실력도 출중했다. 거기에 스노우가 직접 했던 변명도 제법 효과를 봤다. 로빈은 7D 타워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경비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본인이 나서서 이를 해결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로빈은 한동안 7D의 공장이나 연구실, 다른 지점 등을 돌며 일종의 ‘대항군’ 역할을 했고, 매번 승리했으며, 그 과정에서 기존 경비원들이나 보안 요원들을 신나게 갈구는 것으로 자신의 만족감도 충족했고, 결과적으로는 7D의 경비를 강화했다. 로빈은 이 과정에서 예전 동료들을 7D에 스카웃 하기도 했고, 이에 부응해 몇몇은 로빈과 함께 7D 보안 요원이 되었다.
생활도 나아졌다.
스노우가 로빈에게 약속한 연봉과 서비스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완전히 정착한 라이브러리 월드에서 돈은 힘이 되어줬다. 로빈은 남아있는 ‘유쾌한 동료들’의 아이들이나 노인들과 함께 시놉 시티 하층의 낡은 건물에서 상층의 신축 건물로 이사했고, 그들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노인들은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의료 서비스를 받았다. 치료 연구를 전담하는 7D 소속의 마녀들의 치료까지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대가가 뒤따르는 법이었다.
먼저 로빈은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로빈은 자신이 규칙적인 생활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의적 생활은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했고, 나쁘게 말하면 즉흥적이고 무질서했다. 입사 초기부터 로빈은 정해진 시간에 회사로 출근해 정해진 시간까지 일해야 하는 생활에 진절머리를 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로빈은 적응했다.
적응하지 못한 것은 로빈의 몸이었다.
7D의 보안 업무는 도저히 끝이 보이질 않았다.
뭔 놈의 사무실이며 연구실이며 공장이며 기타 비밀 시설이 많은지, 로빈이 매일매일 점검해야하는 양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았다. 매일매일 각 시설의 어제 보안 상황을 점검하면 순찰이 뒤따랐다. 순찰이 끝나면 거리의 치안유지도 있었다. 움브라가 나타나 행패를 부리면, H.U.N.N.T나 자경단과 마찬가지로 7D의 보안팀도 출동했다. 라이브러리 월드와 시놉 시티를 지킨다는 7D의 목적을 무시할 수 없다면서.
그리고 잊을만 하면 스노우는 로빈에게 임무를 하달했다.
움브라를 추적하고 감시하는 일도 있었으며, 인수나 합병하고자 하는 기업들에 스노우가 모두 갈 수 없었기에 대리인으로 가기도 했고, 움브라가 선수를 칠 수 있기에 중요 인물들을 호위하기도 했다. 그 외에 밝힐 수 없는 여러 일들도 있었다.
로빈은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집에 돌아가지 못해, 자기 집이 어디 있었는지도 까먹은 적이 생겼다.
“아, 로빈이다!”
“로빈 아저씨가 왔어!”
그래도 로빈이 집에 돌아갈 때면, 꼬맹이들이 우루루 몰려와 마중을 나왔다. 로빈은 가끔 그게 자신이 그리워서인지, 아니면 집에 돌아갈 때마다 외식거리나 선물을 사서 가기 때문인지 궁금해하곤 했지만, 차마 그걸 물어볼 용기는 내지 못했다.
아이들은 피곤해 당장 침대에 쓰러져 죽은 듯이 자고 싶은 로빈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한때, 아직 의적이던 시절, 아이들은 로빈이 돌아오면 로빈을 보채며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곤 했다. 아이들은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이브러리 월드라는 낯선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던 아이들이 보기에, 어느 날 갑자기 상상도 못하던 좋은 집에 살 수 있도록 해주고, 학교에 다니게 해주고, 맛있는 먹을 것과 좋은 옷을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게 해준 로빈은 영웅이었다. 거기에 아직도 악당들과 싸우며 자신들과 사람들을 지켜준다고 하니까.
변한 것은 로빈의 쪽이었다.
힘들고 지치는 일의 연속. 돌아와서 쉬고 싶은데 귀찮게 구는 꼬맹이들. 그렇지만 그런 아이들을 내칠 수는 없었다. 로빈은 그들의 영웅이었으니까.
사실 영웅 같은 것이 아닌데.
로빈은 아직 스노우 밑에서, 부자인 다른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는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로빈이 꿈꾸는 것은 화려하고 모두가 동경할 수 있는 영웅이지, 이렇게 퇴근을 기다리며 야근을 이어가고 매일 같이 찌들어가는 아저씨가 아니었으니까.
로빈은 이제 아이들이 싫었다. 아이들은 귀찮으니까. 아이들이 자신을 영웅이라고 할 때마다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 자신을 괴롭혔으니까.
‘이게 다 그 꼬맹이 때문이야.’
로빈은 이를 갈며, 남은 서류 업무를 진행했다. 서류 업무라고는 해도, 스노우가 했던 것처럼 증강현실 서류를 보며 하는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퇴근하고 말 거야. 로빈은 이를 악 물었다.
“그때, 왜 저에게 모든 걸 이야기 해준 겁니까?”
언젠가, 로빈은 단 둘이 된 기회에 스노우에게 물었다. 스노우는 무슨 뜻이냐는 듯 로빈을 돌아봤다.
“위치 퀸이나 움브라에 대한 일이며, 7D를 세운 목적이며 하는 이야기들요. 그때는 7D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나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던데.”
“하하, 그거야 당연하죠. 7D의 모든 직원들은 제가 다 확인한 분들이지만, 그들 모두에게 힘든 싸움을 강요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저 직장으로 다니는 분들도 많을 텐데.”
“그러니까, 왜 그런 이야기를 저한테는 했냐고요, 대표님.”
직원이 대표에게 하기는 무례한 말투였지만, 로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스노우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단 둘일 때 한 말이기도 했고. 스노우는 싱긋 웃고는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대표실에서 바라보는 시놉 시티의 풍경이 참 좋긴 하지.
“로빈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요. 정의로운 의적,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 영웅이잖아요?”
‘영악하기는.’
로빈은 그 말을 스노우가 그냥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로빈은 스노우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야 물론 매일 같이 야근과 철야를 밥먹는 것보다 자주 하는 대가로 받는 월급으로 남은 ‘유쾌한 동료들’을 돌봐야 하는 것도 있었지만, 로빈은 거친 운명을 이겨나가는 스노우를 모른 척 할 수도 없었다. 로빈은 꼬맹이에게 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꼬맹이를 싫어했으니까.
스노우는 이제 싸우고 있었다. 스매시 레전드라는, 라이브러리 월드의 이변을 해결하기 위한 대회에서. 누나 위치 퀸과 움브라를 상대로. 그리고 로빈은 곧 스노우가 자신도 그 싸움에 참가해주길 요청할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절대 그냥은 안 해. 보너스 달라고 해야지.’
그렇게 핑계라도 대지 않으면, 무턱대고 들어줄 것만 같으니까.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런 대회까지 참가하면 이런 야근과 격무도 줄어들겠지. 로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이제는 혈관에 흐르는 액체 중 절반 가까이는 그게 아닐까 싶은 에너지 드링크의 효과가 점점 사라지자, 로빈은 수마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꾸뻑거리던 로빈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로빈은 라이브러리 월드 제일 가는 부자였다. 모두가 동경하는 꿈 속의 삶을 사는 남자. 라이브러리 월드를 지배하는 자. 그 돈으로 로빈은 악당들을 무찌르고, ‘유쾌한 동료들’의 남은 이들 뿐만 아니라 라이브러리 월드의 가난한 이들을 돕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로빈이 이야기 속부터 동경하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마치 지금의 누군가가 그러는 것처럼.
꿈 속에는 그 누군가도 있었다. 로빈의 능력에 감동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건네준 사람으로서. 그럼에도 로빈의 곁에 남아있는 시종으로서. 로빈 역시 그를 아꼈고, 그가 건네준 에너지 드링크를 시원하게 마셨다.
‘잠깐, 라이브러리 월드를 지배하는, 모두가 꿈꾸는 삶을 사는데 왜 에너지 드링크야?’
퍼뜩 그 생각이 든 순간, 로빈은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으그극, 머리야…”
“일어나셨나요, 로빈?”
테이블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화면 속의 스노우가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요청했던 보고서는 아직인가요? 빠른 처리 부탁드립니다.”
‘역시 꼬맹이는 너무 싫어!’
로빈은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