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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푼젤편] 무너진 탑의 기억

라푼젤은 꿈을 꾸고 있었다.
숲 속에 있는 높은 탑. 그곳은 라푼젤의 집이자 성이었으며 세상 그 전부였고, 또한 감옥이었다. 그때는 그런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아가는 지루하지만 평온한 나날들. 라푼젤은 그 시간들을 좋아했다. 가끔은 높은 탑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 세상이 궁금했지만, 바깥 세상은 위험하다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충고를 기억하면서, 그리고 그 명령에 거역하는 공포에 라푼젤은 그런 기대를 접고는 했다.
라푼젤은 어머니가 탑을 오를 수 있도록 기나긴 머리카락을 내려주기도 하면서, 가끔은 어머니가 하는 무언가의 ‘실험’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지냈다. 실험은 때때로 아프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라푼젤은 그게 다 라푼젤을 위한 것이라는 말을 믿었다. 애당초, 세상에는 라푼젤과 어머니 단 둘 뿐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탑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라푼젤의 기나긴 머리카락을 붙잡고 올라온 것은 어머니가 아닌 낯선 남자였다. 자신을 어딘가의 왕자님이라고 밝힌 그 사내는 라푼젤에게 탑 바깥의 세상에 대해 알려주었다.
라푼젤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 대신 라푼젤이 느낀 것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였다.
자신의 생활은 평범한 것들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한 일은 어머니들이 딸에게 당연히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실험체로 한 실험들이었다. 라푼젤은 그 사실들을 쉽게 믿을 수는 없었지만, 여태까지 가지고 있던 의문들에 대한 답이 되어줬다.
라푼젤은 탑을 찾아온 어머니에게 이 사실들을 따졌다. 라푼젤은 생각했다. 어머니가 만약 자신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 낯선 남자를 탑에 들여 어머니의 말을 거역한 것에 화를 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반응을 예상하며 라푼젤은 어머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런, 들켰구나.”
그게 다였다.
라푼젤은 놀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으니까. 어머니는 아주 사소한 일이라는 듯, 어떤 감정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마치 라푼젤에 대해서는 어떠한 감정도 없다는 듯.
라푼젤은 분노했다. 어머니에게 대항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라푼젤은 자신의 어머니가 사실은 마녀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라푼젤은 순식간에 어머니에게 제압되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나타났다.
갑자기 한 순간,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탑 안에 있었다.
창백한 피부, 커다란 검은 모자와 드레스. 한 순간에 나타나 허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녀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었다.
어머니에게 제압당한 채 바닥에 짓눌린채 놀라 아무 말도 못하는 라푼젤과는 다르게, 어머니는 그저 처음 보는 이를 대하듯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나는 위치 퀸.”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낯선 이는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마담 레터스를 찾아왔는데, 당신이 맞나요?”
라푼젤은 그때 어머니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다. 둘 뿐의 세상이었기에, 어머니는 어머니로 충분했기에 다른 이름으로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마담 레터스. 라푼젤은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었다. 레터스는 위치 퀸을 보며 물었다.
“처음 보는 분인데. 어디서 오신 거죠?”
라푼젤은 둘의 대화가 어딘가 기묘하다고 느꼈다. 둘의 대화는 분명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같았지만 어머니, 아니 마담 레터스의 반응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고 라푼젤은 느꼈다. 마담 레터스의 질문에 위치 퀸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 이야기의 밖에서 왔어요, 마담 레터스.”
이야기의 밖?
라푼젤은 위치 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라푼젤과는 다르게, 마담 레터스는 그 말에 환하게 웃었다. 평생을 같이 살아왔던 라푼젤조차 보지 못했던 미소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죠?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거죠?”
“네. 그리고 그런 혜안을 가진 당신을 모시고자 찾아왔어요.”
위치 퀸은 마담 레터스에게 싱긋 웃으며 말하고는, 제압된 라푼젤을 바라봤다.
“이쪽 분이 그 유명한 ‘라푼젤’인가요?”
라푼젤은 위치 퀸의 말에 놀랐다. 유명하다고? 자신이? 하지만 되물을 틈새도 없이, 마담 레터스는 라푼젤을 내려보며 감정 없는 말투로 말했다.
“네, 뭐, 그렇죠. 생각보다 유명했나보네요? 실패한 실험체에 불과하지만.”
마담 레터스의 말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지금까지 키워온 딸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은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실패한 실험체’에 대한 실망 정도일까. 그 충격은 라푼젤의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분노했지만, 라푼젤이 생각했던 것은 ‘실패한 실험체’ 취급이 아니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마담 레터스를 어머니라고 생각했고, 자신은 딸로 여겨질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자신을 키워온 것에 대한 애정과 관심, 속인 것에 대한 미안함, 혹은 하다 못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키워왔던 것은 딸이 아니라 그저 ‘실험체’로서였다는 것을, 라푼젤은 이제야 깨달았다. 무엇의 실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직 그 목적을 위해 마담 레터스는 지금까지 자신을 가두고 키워왔다. 라푼젤은 자신의 인생 전체가 부정당한 것을 깨달았다.
“글쎄요, 아직 실패했다고 하기는 이를 것 같은데요.”
라푼젤이 충격에 굳어있는 사이, 위치 퀸은 라푼젤을 내려보며 말했다.
“앞으로 갈 곳에서는, 할 수 있는 실험이 훨씬 많을테니까요.”
라푼젤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담 레터스는 이해했다.
마담 레터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발소리에, 라푼젤은 꿈에서 깨어났다.
“또 실험 시간인가?”
라푼젤은 눈을 감은 채, 몸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무슨 목적인지는 뻔했으니까. 분명 마담 레터스의 부하 마녀가 찾아와 자신을 데려갈 것이고, 그 증오스러운 마담 레터스는 또다시 고통스러운 실험을 할 것이다.
그 꿈속의 순간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기간을 라푼젤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주 오랜 기간이었던 것만은 확실했지만. 햇빛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 감옥과 실험실을 오갈 뿐인 생활은 시간을 기억하기에 좋지 않은 환경이었으니까. 그걸 ‘생활’이라고 부를 수나 있다면.
“실험 시간이라고?”
하지만 들려온 목소리는 마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처음 듣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놀라움에 라푼젤은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돌렸다.
철창 너머로 보이는 낯선 인물. 분위기 때문인지 라푼젤은 한 순간 언젠가 봤던 왕자님을 떠올렸다. 하얀 복장을 입은 아직 어려보이는 소년. 소년은 놀랐다는 듯한 표정으로 라푼젤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푼젤은 문뜩 소년과 누군가가 닮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흐릿한 인상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흐릿해져 사라져버렸다. 라푼젤은 몸을 일으켜 경계하며 물었다.
“넌 누구지? 여기에 어떻게 왔지?”
복장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자는 여기에 속한 인물이 아니다. 이곳, 움브라의 ‘그믐달 마녀회’가 만든 실험실이자 감옥에 드나드는 이는 칠흑 같은 검은 옷을 입은 마녀들 뿐이었으니까. 라푼젤의 질문에 소년은 대답했다.
“내 이름은 스노우야. 너는 누구지? 왜 이런 곳에 갇혀 있는 거야?”
“이런 곳에 뭐하러 온 거지? 너도 움브라의 패거리냐?”
“아니, 나는 움브라를 막기 위해 싸우고 있어. 이곳에 온 것도 그 조사를 위해서고.”
스노우는 라푼젤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라푼젤은 그 말을 순순히 믿을 수는 없었다. 움브라를 막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이곳을 조사하러 왔다고?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어째서 이제서야 나타난 거지?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가?
자신을 적대하는 라푼젤의 시선을 느꼈는지, 스노우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표시로 양 손을 보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곳에 갇혀있으니 믿기 힘든 건 알겠지만, 그래도 날 믿어줘. 너는 누구야? 실험시간이라는 말은 강제로 잡혀왔다는 뜻이지?”
“하, 믿는다고?”
하지만 스노우의 말에 라푼젤은 코웃음을 쳤다. 믿는다니, 무얼 믿는단 말인가?
나에게 믿을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 라푼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뒤, 라푼젤이 진실을 알게 되고 위치 퀸을 만난 뒤.
라푼젤은 마담 레터스의 손에 의해, 다시금 이 탑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형태는 이전과는 달랐다. 쇠사슬로 몸이 묶인 채, 철창으로 막힌 방 안에 갇힌 채, 라푼젤은 더 이상 가짜 ‘딸’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실험체’로 다뤄지게 되었다.
탑은 개조되었다. 라푼젤이 갇힌 방에는 창문이 사라지고, 탑 안은 어느새 태양 대신 일렁이는 마법의 횃불들이 밝히게 되었다. 더 이상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조차 라푼젤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이 자란 것으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어느새 실험 시간이라며 자신을 데리러 오는 것이 마담 레터스에서 다른 마녀들로 바뀌었다. 그 면면을 보아하니 이 탑에 있는 마녀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라푼젤이 알게 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라푼젤은 자신과 마담 레터스, 그리고 탑이 원래의 세계가 아니라 다른 어딘가의 세계로 이동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라푼젤은 마담 레터스가 원래 자신의 친어머니가 아니라, 이야기의 줄거리대로 어머니 행세를 한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푼젤은 위치 퀸이 말했던 ‘이야기의 밖’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라푼젤은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등장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푼젤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믿을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
차갑게 내뱉는 라푼젤의 말과 그 시선에 담긴 감정에, 스노우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날 정도였다. 라푼젤은 그림자 속에서 안광만을 번뜩이며 스노우를 여전히 노려보고 있었다. 스노우는 말없이 그 시선을 잠시 받아냈다.
스노우는 품 속에서 검을 꺼냈다. 손잡이만 있던 검은 스노우가 스위치를 누르자, 빛으로 된 검날을 만들어냈다. 라푼젤은 몸을 낮추고 맞서 싸울 자세를 잡았다.
“하, 그것 봐. 말로 안 속으니까 검을 꺼내는 거냐?”
라푼젤은 살기등등하게 말했다. 비록 발목은 쇠사슬에 묶여 있고, 이 좁은 곳에 갇혀있지만 라푼젤은 얌전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스노우는 검을 휘둘렀다.
땡그랑, 땡, 땡…
금속음을 남기며, 라푼젤을 가두던 철창이 바닥에 떨어져 굴러갔다.
싸움을 각오하던 라푼젤은 그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움직이지 마.”
스노우는 잘린 철창을 넘어 라푼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라푼젤은 그 말에 따랐다. 스노우는 몸을 숙이고 칼로 라푼젤의 발을 묶어두던 쇠사슬을 잘라냈다.
“무슨 속셈이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날카롭게 묻는 라푼젤에게, 스노우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말을 안 믿어준다면, 행동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잖아? 이젠 좀 믿어줄 수 있겠어?”
스노우의 말에 라푼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스노우는 라푼젤이 더 이상 싸울 생각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스노우는 다시 한 번 라푼젤에게 물었다.
“우선 다시 한 번 자기소개부터 할까? 나는 스노우. 말했듯 여기에는 움브라를 조사하러 왔어. 너는 누구야?”
“내 이름은 라푼젤.”
마침내 라푼젤의 이름을 들은 스노우는 안도했다. 적어도 자신이 누군지 밝힐 정도로는 마음을 놓았다는 뜻이니까.
라푼젤은 매서운 눈으로 스노우를 마주보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갇혀 있는 이유는, 내가 ‘그믐달 마녀회’의 실험체이기 때문이지.”
“그믐달 마녀회…”
역시. 스노우는 의심이 사실로 변한 것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믐달 마녀회. 그건 악당들이 모인 움브라 안에서도 특히 비밀스러운 조직으로, 그 이름조차 아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스노우 역시 한 때는 그저 헛소문으로 짐작했을 정도였다. 그들은 철저하게 베일에 쌓인 조직이었다.
움브라의 수장, 위치 퀸은 그 이름대로 마녀들의 여왕으로 선정되었다. 이야기 속의 마녀란 대부분 악한 존재들. 그들은 망설임 없이 위치 퀸을 따르기로 맹세했고, 그들은 소문 사이에 숨은 채 이곳저곳에서 그들의 사악한 마술을 서로 교류하며 연구하고 있었다.
“그럼 여기가 그믐달 마녀회의 연구소란 말이야?”
스노우의 질문에 라푼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을 책임지는 마녀는 마담 레터스. 나를 키웠던 존재이자… 내가 복수할 상대지.”
그렇게 말하는 라푼젤의 눈은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것과도 같았다. 그 위압감에 스노우는 자신도 모르게 굳어버릴 정도였다.
지금까지 부모라고 생각했던 마담 레터스는, 계속해서 라푼젤을 괴롭혔다.
라푼젤은 마담 레터스는 자신들의 세계가 이야기 속이라고 추측하고 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마담 레터스에게 위치 퀸의 등장은 자신의 추측이 확신이 되는, 연구자로서 ‘최고로 기쁜 순간’이었던 모양이었다.
마담 레터스는 자신의 마술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발전시키고 싶어하는, ‘진짜배기’ 마녀였다. 마담 레터스는 다른 이야기의 마녀들과 접촉하여 새로운 비술을 배우고 또다른 마술이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연구를 발전시키고 싶어했고, 위치 퀸의 등장과 라이브러리 월드의 존재는 그 꿈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마담 레터스는 탑을 자신과 그믐달 마녀회를 위한 연구소로 만들었고, 그곳에서 다른 이야기에서 온 마녀들에게서 마술 연구를 배우거나, 또는 마녀들을 가르치곤 했다.
“탑 안에는 나 말고도 ‘실험체’들이 더 있는 모양이지만… 나도 정확히 누가, 얼마나 있는지는 몰라. 실험을 할 때 말고는 늘 이 안에 갇혀 있었으니까.”
얼마나 되는지도 모를 시간동안 갇혀 있는 사이, 라푼젤은 자신이 불려가는 시간이나 주기로 이 탑에는 자신 외에도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실험체로 갇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자신과도 같이 늘 고통스러운 실험을 당하고 있으리라는 사실도. 하지만 그런 사실은 라푼젤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라푼젤에게는 다른 이를 걱정할 여유는 없었으니까.
“전부 그 마녀들 때문이야. 그리고 마담 레터스, 그리고 그 수장 위치 퀸…!”
그 이름들을 떠올릴 때마다, 라푼젤은 몸이 타오르는 것만 같은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그동안 실험으로 받은 고통이 지금도 느껴지는 것만 같아, 라푼젤은 양 팔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절대 용서 못해…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라푼젤의 말에는 귀기가 서려있어, 스노우는 두려움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파랗게 불타고 있던, 벽에 걸린 마법의 횃불들은 색을 바꿔가며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스노우와 라푼젤 모두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들킨 건가…!”
“흥, 네가 멍청하게 구니까 그렇지.”
이를 가는 스노우를 보고 라푼젤은 코웃음을 쳤다. 라푼젤은 발끝으로 스노우가 잘라낸 쇠사슬을 툭툭 치며 말했다.
“멋대로 잘라내니까, 뭔가 신호가 간 모양이야.”
“이쪽이야!”
느긋하게 말하는 라푼젤의 팔을 스노우는 재빨리 움켜쥐고 도망치려 했지만, 라푼젤은 그 팔을 쳐내며 외쳤다.
“날 만지지 마!”
“그렇지만,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야!”
스노우는 다급하게 외쳤다.
“이대로 있으면 그믐달 마녀회가 우릴 잡으러 올 거야! 어서 도망가지 않으면…”
“도망? 도망 같은 걸 갈 리가 없잖아?”
라푼젤의 질문에 스노우는 말문이 막혔다. 라푼젤은 웃고 있었다. 스노우는 그 미소가 어딘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기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갇혀있었는데, 겨우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다시 잡힐지도 모른다면 무서워해야 하지 않나? 어째서 라푼젤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웃을 수 있지?
“넌 아무 것도 몰라, 스노우.”
라푼젤은 스노우에게서 몸을 돌려, 스노우가 있는 출구 쪽이 아니라 갇혀있던 감방의 벽으로 다가갔다. 스노우는 문뜩 불안함을 느꼈다. 라푼젤이 스노우에게 믿을 수 없다고 했던 것은, 그 반대로도 성립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라푼젤은 자신의 어머니가 이 탑의 수장, 마담 레터스라고 했다. 그렇다면 라푼젤은 갇힌 것이 아니라, 함정이었던 것 아닐까?
“후후… 후후후… 하하하하하하!”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는 라푼젤의 모습에, 스노우는 동요하던 마음을 달래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대응할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스노우를 돌아보며 라푼젤은 말했다.
“도망? 도망이라고 했지. 웃기지 마.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이 날을… 기다렸다고?”
스노우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돌아본 라푼젤의 눈빛이 마치 맹수와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글거리며 나오르는 눈동자를 한 채, 라푼젤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바로 이 날을. 복수의 날을 말이야!”
그 말과 함께, 라푼젤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노우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금색으로 빛나는 그 무언가는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마치 채찍과도 같이, 철퇴와도 같이, 의지를 지닌 것처럼. 그 정체를 스노우는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
“머리카락…?”
스노우는 뒤늦게 떠올렸다. 라푼젤,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분명 기나긴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그 긴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놀란 스노우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라푼젤은 킥킥거렸다.
“맞아. 사랑하는 어머니가 온갖 실험으로 만들어주신 감사한 선물이지.”
그렇지만 스노우에게 라푼젤의 웃음은 즐거운 웃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증오와 분노를 스노우는 느낄 수 있었다. 라푼젤의 머리카락 역시 주인의 분노를 표현하듯 살랑거리며 일렁이고 있었다.
“끔찍하고 고통스러웠지만… 언젠가 이 감옥을 벗어나 복수하기 위해 힘을 길렀지. 스노우, 네가 와준 덕분에 예정보다 빨리 복수할 수 있게 됐어!”
라푼젤은 분노에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라푼젤의 이야기는 유명하고, 라이브러리 월드에서는 그런 유명함은 힘이 되어줬다. 라푼젤의 머리카락에는 일부 이야기에 나오는 것 같은 마법의 힘은 없었지만, 마담 레터스는 그 힘이 숨어있을 거라 생각하고 실험을 통해 끌어내는데 성공했던 것이었다.
라푼젤의 머리카락은 이제 마치 손처럼 라푼젤이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움직이게 되었다. 거기에 마법의 힘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실험과 실험 사이의 시간동안, 라푼젤은 다가올 복수를 위해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점검하고, 단련했다. 머리카락 한올 한올까지 조종할 수 있게 되자, 라푼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어떤 형태로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복수의 칼날이든, 심판의 철퇴이든, 무엇이든.
“이제 이 탑을 무너뜨리고, 마담 레터스에게 복수하겠어! 그리고 언젠가 위치 퀸에게도! 누구도 날 막을 순 없어!”
“잠깐, 기다려!”
스노우는 뒤늦게 외쳤지만, 이미 라푼젤은 자신의 마법 머리카락을 힘껏 휘두르는 중이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뭉치자, 머리카락은 그 형태를 바꾸며 철퇴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벽을 두드리자, 벽은 순식간에 박살나고 그 너머에 펼쳐진 석양이 지는 하늘이 드러났다.
아아, 이 얼마만에 보는 하늘일까. 라푼젤은 생각했다.
어렸을 적 탑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보던 하늘과는 다른, 넓게 펼쳐진 하늘. 이런 넓은 하늘을 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기에, 라푼젤은 자신도 모르게 넋을 빼고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등 뒤에서 놀란 스노우도 무시한 채, 앞으로 일어날 일도 잊은 채.
“거기서 꼼짝 하지 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들려오는 발소리. 라푼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달려온 그믐달 마녀회의 조수 마녀들과, 검을 꺼내들고 자세를 잡는 스노우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 도와주려고?”
“이대로 나만 도망칠 수도 없으니까.”
스노우의 대답에 라푼젤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탈출도, 복수도 이런 식으로 이루게 될 줄은 몰랐지만, 라푼젤은 그리 나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어느쪽이든 빨라졌을 뿐이니까. 그리고 설마하니 누군가와 함께 싸우리란 생각은 해본 적도 없던 라푼젤에게, 이런 상황은 예상 외의 즐거움을 가져다줬다. 지금까지 라푼젤의 인생은 나쁜 의미로 예상이 깨지는 일만 벌어져왔으니까.
“그럼 이제, 복수의 시간이야.”
라푼젤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라푼젤은 드넓은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해는 이제 저 하늘 너머로 사라지고 있어, 반대편의 하늘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잔해 위에 걸터 앉은 라푼젤의 모습을, 스노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반으로 무너진 탑의 윗부분은 라이브러리 월드의 하늘바다를 떠돌고, 반도 채 남지 않은 밑둥은 수많은 파편을 흩뿌린 채였다.
도대체. 스노우는 할 말을 잃은 채 그저 무너진 탑을 바라봤다..
이 탑을 무너트린 것은, 온전히 라푼젤의 몫이었다. 스노우는 그 힘에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싸움에 대한 실력이라든가, 기술 같은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라푼젤은 지금까지 쌓아왔던 분노를 터트린 것이겠지. 스노우는 그렇게 납득하려 했으나, 혼자 힘으로 거대한 탑을 쓰러트린 것은 스노우의 상식도 같이 부숴버렸다.
“라푼젤.”
동요하던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 스노우는 입을 열었다. 가리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너른 하늘을 바라보던 라푼젤은 스노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라푼젤은 웃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과도 같이. 이를 드러내는 그 미소는 기쁨과 흉폭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 탑에 마담 레터스는 없었어. 아마 마침 자리를 떠나 있었던 거겠지. 내 복수를 달성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상관 없어.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허무하니까.”
탑 안에는 마담 레터스는 없었다. 그 부하인 마녀들이 있을 뿐. 탑이 무너지자 스노우와 라푼젤에 맞서 싸우던 그들은 혼란에 빠져 도망가버렸다. 스노우는 라푼젤이 그들을 곧바로 쫓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라푼젤은 마담 레터스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그들을 보내줬다.
“그렇다는 건…”
“찾아야지. 어디에 숨어있던, 어디로 도망치던, 반드시 찾아내겠어. 그리고 복수하겠어.”
라푼젤은 단호하게 말했다.
라푼젤은 마담 레터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 때문에 지금까지 라푼젤의 모든 인생은 거짓과 고통 뿐이었으니까.
어머니라고 믿었던 존재는 가짜에, 평온한 나날이라고 생각했던 기억들은 실험이었고,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뒤에는 고통 뿐이었다. 그 모든 것들을 그저 없는 일로, 어쩔 수 없는 일로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담 레터스도, 위치 퀸도 절대 용서 못해. 내가 느낀 고통을 똑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느끼도록 해주겠어.”
라푼젤의 증오 섞인 말과 함께, 머리카락이 칼날처럼 변해 마치 채찍처럼 움직였다. 그것이 라푼젤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스며나온 결과라는 걸 스노우는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가지 않겠어?”
스노우는 라푼젤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라푼젤은 놀랐다는 듯 스노우를 돌아봤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위치 퀸과 움브라에 맞서기 위해 싸우고 있어. 그걸 함께 할 동료도 구하고 있고. 라푼젤, 네 목표도 위치 퀸과 움브라와 싸우는 거라면, 우리가 함께 한다면 더욱 쉬워지지 않을까?”
라푼젤은 아무 말도 없이 스노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노우는 라푼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말했다.
“내가 만든 회사, 7D의 기술력이라면 라푼젤 너에게도 더 좋은 장비를 준비해줄 수 있을 거야. 오랜 감금으로 약해진 몸도 회복할 수 있을테고. 너에게도 좋은 이야기 아닐까?”
“그 검. 그러고 보니 특이한 검이었지.”
라푼젤은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스노우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가리켰다. 스노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회사에서 개발한 시작품이야. KISS (무질량 간섭 도검 시스템 Kinetic-less Interference Sword System)라고 해. 무엇이든 벨 수 있지. 라푼젤 너에게도 이런 장비를 만들어줄 수 있을 거야.”
라푼젤은 생각했다. 그런 멋진 장비 같은 것은 탐나지 않는다. 사실, 지금까지 누군가와 함께 복수한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라푼젤의 인간관계는 평생 마담 레터스 하나 뿐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라푼젤은 스노우의 제안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복수가 편해진다든가 도움을 받는다 이전에, 처음으로 믿을 수 있는 인간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스노우는 고민하는 라푼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네가 겪은 일처럼, 위치 퀸은 라이브러리 월드 전체에 위협이야. 나는 그런 위치 퀸을 막고 싶고. 네가 함께라면, 분명 이룰 수 있을 거야. 나와 함께 해주지 않겠어?”
라푼젤은 떠올렸다. 전해들은 라푼젤의 원래 이야기, 운명에서는 탑에 찾아왔던 왕자가 라푼젤을 도와주고 구해주는 역할이었다고 했다. 탑에 찾아온 왕자라. 라푼젤은 스노우를 보며 웃었다.
어느새 스노우는 라푼젤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라푼젤에게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억 뿐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짧은 만남이었지만 스노우가 보여준 모습들은, 스노우를 한 번 믿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라푼젤이 머뭇거리면서도, 스노우가 내민 손을 맞잡으려 할 때ㅡ
“잘도 탑을 무너트렸구나, 스노우.”
들려온 목소리에 스노우도 라푼젤도 고개를 돌렸다.
처음 봤을 때처럼, 조금 떨어진 장소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서있었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와 모습이었다.
창백한 피부, 커다란 검은 모자와 드레스. 그때와 다른 점은, 그녀가 혼자뿐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등 뒤에 들어선 마녀의 무리들. 위치 퀸의 한쪽에는 거대한 늑대가, 다른 한쪽에는 마담 레터스가 있었다.
“위치 퀸…! 마담 레터스!”
라푼젤은 이를 갈며 외쳤다. 그렇지만 역시나, 마담 레터스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위치 퀸 역시 라푼젤은 무시한 채, 스노우를 향해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스노우.”
그리고 스노우는 주저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누님.”
누님?
라푼젤은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며 스노우를 바라봤다. 스노우의 표정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긴장감은 동시에 라푼젤에게 스노우와 위치 퀸이 허튼 소리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었다.
“내 그믐달 마녀회가 아끼는 탑을 무너트리다니, 제법이구나. 여기에서도 날 방해하려는 거니?”
“당연한 사실을 묻지 마시죠. 반드시 누님을 막을 겁니다.”
놀리는 듯, 마치 정말 동생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위치 퀸과, 단호하지만 남매라는 점을 숨기지 않는 스노우의 행동. 그 두 사람의 모습은 라푼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라푼젤은 완전히 무시한 채, 위치 퀸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이야기 속에서처럼은 되지 않을 거란다. 이번에는 네 선전포고로 생각하도록 할게, 스노우. 그러나 앞으로는 이렇게 쉽진 않을 거란다.”
위치 퀸은 마치 그 말만을 하려고 했다는 것처럼 몸을 돌리려 했다. 라푼젤은 재빨리 외쳤다.
“기다려, 위치 퀸!”
위치 퀸은 돌아보려던 걸음을 멈췄다. 곁눈질로 자신을 보며,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한 위치 퀸의 반응에 라푼젤은 더더욱 분노했다. 라푼젤은 머리카락을 검처럼 만들어 싸울 자세를 취하며 외쳤다.
“탑을 무너뜨린 건 바로 나야! 네가 내 인생을 망쳤어! 나에게 줬던 고통, 반드시 되갚아 줄거야!”
표독스러운 라푼젤의 외침을 위치 퀸은 그저 듣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위치 퀸은 입을 열었다.
“누구지, 넌?”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한 그 질문에 라푼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대신 대답한 것은 위치 퀸의 곁에 있던 마담 레터스의 쪽이었다.
“제 실험체에요. 라푼젤.”
“아.”
마담 레터스의 아무 감정도 없다는 듯한, 그저 사실을 전하는 듯한 말에 위치 퀸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대답했다. 그녀에게 역시 아무런 감정은 없었다. 그리고 라푼젤은 그런 둘의 반응에, 더는 견딜 수 없다고 느꼈다.
“으아아아아아!”
“기다려, 라푼젤!”
제대로 소리가 되지 않은 분노를 토해내며 라푼젤은 뒤에서 말리는 스노우의 말도 무시한 채 위치 퀸과 마담 레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라푼젤이 그들에게 도달하기 전, 위치 퀸의 손짓과 함께 특이한 모양의 거울이 나타났다. 거울이 밝은 빛을 비추자, 라푼젤과 스노우는 재빨리 눈을 가렸다.
둘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허공에서 위치 퀸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늘 외톨이였던 네게 친구가 생겼다니 기쁘구나, 스노우. 그럼 다시 보도록 하자꾸나. 내가 마침내 운명에 승리하는, 바로 그 날 말이야.”
“이리 당장 나와! 찢어주겠어!”
라푼젤은 허공을 향해 외치며, 위치 퀸이 있던 장소에 머리카락의 칼날을 휘둘러 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람소리와 함께 침묵이 찾아왔다. 어느새 태양은 완전히 저물어, 라푼젤과 스노우가 있는 잔해에도 어둠이 찾아왔다.
“라푼젤…”
“다가오지 마!”
스노우는 라푼젤을 위로하려 손을 내밀었지만, 라푼젤의 외침과 함께 손에 격통이 느껴졌다. 스노우의 손에는 베인 듯한 상처와, 그곳에서 흐르는 선명한 선혈이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든 스노우는, 라푼젤이 칼날과도 같은 머리카락을 위협하듯 흔들며 자신으로부터 떨어진 잔해 위에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너도, 너도 날 속였어!”
“라푼젤…”
라푼젤의 적개심 가득한 외침에, 스노우는 그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라푼젤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으니까. 라푼젤은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누나라고? 위치 퀸의 동생이라고? 그런 주제에 위치 퀸과 움브라를 쓰러트리기 위해 협력해달라고? 잘도… 잘도 그딴 말을!”
“내가 위치 퀸을 막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건 사실이야. 네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사실이고. 위치 퀸의 동생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하지만…”
“그래, 막기 위해 싸운다는 거지? 쓰러트리려 하는 게 아니라.”
라푼젤의 지적에 애써 설득하려던 스노우는 다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라푼젤은 그 반응이 정답이라는 듯 웃었다.
“대답해, 스노우. 만약 너와 같이 싸운다고 치자고. 그럼 넌 위치 퀸을 쓰러트리기 위해, 없애버리기 위해 전력으로 날 도울 거야? 내가 위치 퀸을 없애버리겠다고 한다면, 너는 나를 도울 수 있겠어?”
“.......”
스노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푼젤이 예상하던대로. 라푼젤은 웃었다.
라푼젤이 분노한 것은, 단순히 스노우가 위치 퀸의 동생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자신도 마담 레터스의 딸이었다. 그걸 밝히거나 밝히지 않은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라푼젤이 분노한 것은, 스노우가 마음 속으로는 위치 퀸을 자신처럼 증오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스노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위치 퀸을 ‘막는’ 것이다. 자신처럼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녀석은 만에 하나 위치 퀸이 패배를 시인하고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면, 그녀를 용서하고 말 것이다. 자신과는 다르게.
만약, 그때.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처음 반발했을 때 마담 레터스가 그렇게 했다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위치 퀸은 적인 스노우에게 동생으로서의 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이든, 그 사이에는 관계와 감정이 존재했다. 자신과 마담 레터스와는 다르게.
그리고, 그렇기에.
라푼젤은 그 이상 떠오르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라푼젤은 물러났다. 부서진 이야기 섬의 끄트머리, 벼랑 쪽으로. 스노우는 그런 라푼젤을 막고자, 상처 입은 손을 내밀었다.
“라푼젤…”
“다가오지 말라고 했잖아!”
라푼젤의 외침에 다시 스노우의 걸음은 멈췄다. 라푼젤은 마저 벼랑 쪽으로 뒷걸음질 치며, 스노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와 함께하지 않겠냐고 물었지, 스노우? 그 대답은 거절이야. 나는 나홀로, 내 혼자 힘으로 내 복수를 달성하겠어. 언젠가 반드시 위치 퀸과 마담 레터스에게 내가 겪은 고통을 느끼게 해주겠어. 그리고 그걸 방해하려 든다면, 그게 누구든 용서하지 않을 거고.”
스노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푼젤은 마저 한 걸음 물러나, 이야기 섬 너머의 하늘바다로 몸을 던졌다.
“안녕, 왕자님.”
“라푼젤!”
스노우는 라푼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달려나갔다.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지만 스노우가 발견한 것은, 하늘바다 저 밑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날개로 바꿔 날아오르는 라푼젤의 모습이었다.
“한 번은 용서하겠어. 그렇지만 두 번은 없어.”
라푼젤은 스노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해가 진 라이브러리 월드의 밤하늘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