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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편] 스노우,꿈을 꾸다

ㅡ 생각해보면, 난 늘 혼자였구나.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회색으로 물든 잿빛 하늘. 그 사이로 내리는 새하얀 눈. 타닥거리며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눈이 소리를 머금은 방 안에 들려왔다.
스노우는 타닥거리는 소리 사이로 다른 소리를 기대하며, 그저 창밖을 바라봤다.
방 안에는 스노우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늘 그랬듯이.
스노우는 왕자였고, 늦둥이였다. 스노우의 어머니, 왕비는 스노우를 낳다 그만 목숨을 잃었고, 왕은 늦은 나이에 본 아들인 스노우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그러나 왕의 자리는 한가한 자리가 아니었다. 늘 밀려드는 일에 왕은 스노우와 함께 할 시간을 갖기도 힘들었다. 하인들은 전통에 따라 부름이 있기 전까지는 스노우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
스노우는 외롭다는 감정을 배운 적은 없었고, 설령 느꼈다고 하더라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운명이었다. 왕자로서, 스노우는 약한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기에.
그렇기에 스노우는 그저 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봤다. 소복소복 내리는 눈이 소리를 흡수하는 고요 너머에서, 기다리던 소리가 들리기를 기대하면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리고, 이윽고, 희미하게 스노우가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료하게 기다리던 스노우의 얼굴에, 조금씩 선명해지는 소리처럼 미소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왕국 만세!”
“글라시아 만세!”
와아아아ㅡ...
왕궁으로 향하는 거리는 사람들의 환호와 군악대의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웃 나라의 군대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왕국 군을 환영하는 퍼레이드였다.
스노우가 사는 왕국은, 스노우가 태어날 무렵까지는 작은 소국이었다.
주변에는 강력한 이웃나라들이 여럿. 그들 사이에 끼어있는 왕국은 평화로웠지만, 언제나 언젠가 이웃 나라가 자신들을 침략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두려워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런 시절은 이제 기억에서도 잊히기 시작한 과거였다.
“글라시아 만세!”
“글라시아 만세!”
사람들의 외침은 병사들의 대열이 왕궁에, 병사들을 치하하러 나온 왕과 왕자 스노우의 앞에 올 때까지 이어졌다.
“누님, 오셨군요!”
기다렸다는 듯 말하는 스노우의 말에, 백마에 올라탄 채 병사들의 대열을 이끌던 장군은 싱긋 웃어주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말에서 내렸다.
“잘 지냈지, 스노우?”
웃는, 장난기 섞인 얼굴로 스노우의 머리카락을 헝클어주고, 장군은 몇 걸음 걸어가 노쇠한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돌아왔구나, 내 딸. 글라시아.”
글라시아. 스노우의 누나이자, 장녀.
그리고 소국에 불과했던 왕국을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든,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일어나거라.”
왕의 말에 글라시아는 몸을 일으켰다. 흑요석 같은 빛깔의, 투명하지만 칠흑 같은 풍성한 머리카락에 새하얀 눈이 떨어졌다.
그 머리색과 같은 검은 드레스와 갑옷에도. 기나긴 전투를 거쳐왔음에도 글라시아의 복장은 전혀 더러움이 없었다.
“원정은 끝났느냐.”
왕의 물음에, 글라시아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폐하.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적들의 성을 함락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를 위협할 적은 없습니다.”
“글라시아!”
“글라시아!”
환호가 이어지는 것을 왕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스노우는 그 함성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노우에게 있어서 글라시아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니까.
장녀였던 글라시아는, 늦둥이 스노우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성인식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성인이 되자, 글라시아는 작은 소국이었던 자신의 나라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대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강력한 마력. 그 힘을 바탕으로 왕국의 얼마 안 되는 병사들을 데리고, 글라시아는 왕국을 위협하는 주위의 나라와 전쟁을 시작했다. 글라시아의 마력과 지휘 아래에서, 왕국 군은 이웃 나라의 군대들을 하나씩 무너트리고 그들을 흡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마지막 나라를 평정하기 위한 원정이 끝난 것이었다.
스노우는 그런 누나를 존경했다.
왕이 있음에도 신경 쓰지 않고 글라시아의 이름만을 외치는 병사들과 사람들. 모두가 글라시아를 존경하고 따른다. 글라시아는 자신과는 다르게, 그저 ‘왕자’나 ‘공주’라서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업적을 세우며 무언가를 만들어간다. 싸움에서 승리하고, 영웅으로서 사람들에게 칭송받는다. 스노우는 그런 누나를 존경하고, 누나처럼 되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까요?”
부끄럽다는 듯, 하지만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곁눈질하며 하는 스노우의 질문에, 글라시아는 작게 소리내 웃었다.
“글쎄, 스노우 너에게는 무리 아닐까? 스노우는 꼭 공주님 같으니까.”
“너무해요, 누님…”
스노우는 글라시아의 말에 입을 삐쭉 내밀고는 고개를 돌렸다. 글라시아는 가끔 장난이라면서 스노우에게 여자 옷을 입히곤 했다. 얼굴이 예쁜 스노우에게는 어울렸지만, 스노우는 누나의 장난에 어쩔 수 없이 맞춰주면서도 부끄러워 싫어했다.
풀이 죽은 듯 토라지는 스노우의 말에, 글라시아는 방금 전보다는 큰 소리로 웃고는 말했다.
“농담이란다, 농담. 분명 스노우 너도 그럴 수 있을 거란다. 이 글라시아 님의 동생이지 않니? 네가 어른이 된다면, 분명 너도 훌륭한 영웅이 될 거야.”
자신의 머리를 헝클이면서도, 따뜻한 목소리로 하는 글라시아의 말에 스노우는 웃었다.
돌아온 병사들에 대한 환영식이 끝나고, 스노우는 글라시아와 잠시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바로 이날 밤, 글라시아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행해질, 중요한 의식이 있었으니까.
“누님은 분명 훌륭한 왕이 되실 거예요.”
“고마워, 스노우.”
글라시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왕국에서는 왕위계승식이 열린다.
나이가 들어 노쇠한 왕이, 공식적으로 다음에 자신을 이어 왕위를 이을 후계자를 선정하는 의식. 글라시아의 귀환에 맞춰 열리기로 한 그 계승식에서, 왕국의 누구도 글라시아가 왕위를 이을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저도 좋은 왕국을 만들기 위해서, 누님과 같이 노력할게요.”
스노우는 진심이었다. 스노우는 글라시아를 존경했고, 글라시아야말로 왕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글라시아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강력한 마력만이 아니었다.
글라시아의 곁에는 늘 사람들이 따른다. 글라시아가 이끄는 군대의 장군들이나 병사들 뿐만이 아니었다. 점령당한 이웃 나라들도 처음에는 침략한 글라시아를 미워했지만, 몇 년이 지나기도 전에 자신을 왕국의 백성으로 생각하며 글라시아를 따르는데 불만이 없게 되었다.
그건 늘 혼자 있는 스노우에게는 늘 부러운 일이었고, 배우고 싶은 일이었다.
“그런데 누님, 이번 원정에서는 뭔가 재미있는 일은 없었나요?”
하지만 그런 말을 하기에는 부끄러웠기에, 스노우는 말을 돌렸다.
성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스노우에게, 글라시아가 돌아와 들려주는 성 밖과 다른 나라의 일들은 즐거운 이야기거리가 되어주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글라시아는 감상에 젖은 표정을 지우고, 조금은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원정에서는 신기한 물건을 찾았단다. 나중에 스노우 너에게도 보여줄게.”
“신기한 물건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스노우의 질문에 글라시아는 대답했다.
“응. 무려… 말하는 마법의 거울이란다. 성의 지하실에 엄중히 봉인되어 있었지. 미래를 예지하기도 하고, 주인이 원하는 진실을 알려주지만, 위험해서 봉인되어 있다던가…”
“그거, 괜찮은 건가요?”
스노우는 두렵다는 듯 물었다. 글라시아는 그런 스노우의 반응에 뭔가를 눈치챘다는 듯, 진지하고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말이지, 사실 그 거울에는 악마가 깃들어 있다고 해. 그래서 지하실에 엄중히 봉인되어 있던 거고 말이야. 그래서 화가 난 악마는 언제든지 거울 밖으로 나오려고 하고, 그래서 혼자 있을 때, 거울을 보면… 와악!”
“으아아악!”
호기심과 두려움에 두근두근하면서 글라시아의 이야기를 듣던 스노우는, 갑작스러운 글라시아의 외침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글라시아는 그런 스노우의 모습에 깔깔대며 웃었다.
“까, 깜짝 놀랐잖아요. 누님…”
“하하하하하! 하여간, 아직 어린애구나 스노우는. 이렇게 쉽게 속으면 어떻게 해?”
스노우의 투덜거림에도 글라시아는 소리내어 웃었지만, 스노우는 그 웃음이 싫지만은 않았다.
글라시아는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는 제1 왕녀답게, 영웅이자 이윽고 왕이 될 재목으로서 늘 고고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동생인 스노우 앞에서는 이렇듯 장난도 치고 허식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스노우는 그런 누나의 모습이 좋았다.
하지만.
“짐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자는…”
그런 행복한 시간은, 단 한마디의 말로 끝나버렸다.
“짐의 아들, 스노우임을 선언한다.”
고작 몇 시간 뒤.
왕의 그 발표에, 계승식에 모인 이들은 순간 숨을 삼켰다.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했다.
이윽고 이어진 것은, 그 자리를 메우듯 가득한 웅성거리는 소리. 왕위계승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왕을 도울 수많은 신하들, 왕국 내의 유력한 가문이나 글라시아가 손수 점령한 나라의 귀족들, 군을 이끄는 수많은 장군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글라시아 님이 왕위를 이어받는 게 아니었다고? 스노우? 그 어린 왕자가 다음 왕이 된다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아버님…?”
웅성거림에 놀라, 스노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왕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왕은 그 어떤 동요도 없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결정한 일이라는 듯, 그 어떤 일이 생겨도 결정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듯.
웅성웅성. 왕은 소란을 잠재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스노우의 귀에도 분명하게 들어왔다. 어째서 스노우지? 어째서 글라시아가 아니지? 그런 원망과 탓하는 소리들. 그렇다면 이제 시대는 스노우의 시대인가?지금부터라도 스노우에게 잘 보여야 하나? 그런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소리들. 그 소리에 무심코 등 뒤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 스노우가 본 것은 의심, 기대, 질투, 선망, 동경, 원망, 그런 수많은 감정들로 가득한 시선들이었다. 스노우는 그 시선들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아, 누님은.
스노우는 떠올렸다. 이 순간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줄 수 있을 사람을. 지금, 스노우는 누구보다 외롭고 두려웠다. 왕도, 저 사람들도, 분명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님이라면. 하나뿐인, 존경하고 사랑하는 누님이라면 자신의 편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로 스노우는 옆에서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있는 글라시아를 바라보았다.
아, 누님은.
그리고 스노우는 깨달았다. 아니, 이미 알고 있지만 잊고 싶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글라시아는 평생을 왕이 되고 싶어했음을. 그리고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을,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왔음을.
스노우는 글라시아의 그런 시선을 처음으로 보았다.
마치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듯한, 증오와 원념으로 가득 찬 시선. 배신감으로 가득 찬, 억울함과 분노가 넘쳐흘러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시선. 스노우는 글라시아의 그런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취소해주세요, 아버님!”
늦은 밤.
왕의 침실로 찾아간 스노우는, 왕에게 그렇게 외쳤다.
왕은 아무 말도 없이, 굳은 표정으로 스노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이 마치 밤중에 찾아온 무례를 질책하는 것만 같았지만, 스노우는 그에 굴하지 않고 다시금 외쳤다.
“저는 아직 어리고, 누님에 비할 재목이 못 됩니다. 누님은 왕국을 강하게 만들고, 왕국을 위해 헌신했지 않습니까? 누님이야말로 왕의 재목입니다.”
“그럴 순 없다.”
“어째서요? 누님이 아들이 아니라서입니까?”
스노우의 질문에 왕은 고개를 저었다.
“글라시아는 싸움을 좋아하고, 늘 승자가 되기를 원한다. 장군으로서는 훌륭하지만, 왕으로서는 재목이 아니다.”
“그럼 아버님은 왜 여태껏 누님을 막지 않으셨습니까? 지금까지 누님이 주위 나라를 복속시키고, 왕국을 키우고 강하게 만들 때는 그 덕을 보셨으면서, 어째서 누님이 가장 기대한 순간에 그 기대를 배신하신 겁니까?”
“처음부터 글라시아를 왕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결국 참지 못하고 스노우는 큰소리로 외쳤다.
왕은 침묵했다. 노한 듯, 슬픈 듯, 복잡한 심정을 눈빛으로만 드러내며 왕은 스노우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윽고 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런 운명이기 때문이다.”
“운명… 이라고요?”
스노우는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스노우는 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스노우는 왜인지 그런 왕이, 방금 전과는 다르게 늙고 지친 것처럼 보였다.
“스노우, 잘 듣거라. 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운명이다. 너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운명을 지닌 것이다.
그게 아무리 괴롭고, 원하지 않는 운명이라고 해도 말이지. 그리고 운명은 바꿀 수도 없고, 바꿔서도 안 되는 것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아버님?”
왕의 말을 이해할 수 없던 스노우는 되물었지만,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왕은 손을 들어 침실을 나가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결정에 번복은 없다. 다음 왕위는 글라시아가 아니라 스노우, 네가 이을 것이다. 그만 나가보거라.”
“하지만…”
“나가보거라.”
스노우는 어떻게든 왕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지만, 왕의 반응은 냉담했다. 스노우는 깨달았다. 고집을 부려도, 무엇을 어떻게 해도, 왕의 결심을 돌릴 방법은 없다는 것을.
그날부터, 스노우의 생활은 변화했다.
자신에게 장난도 치고, 허울 없는 모습을 보여주던 글라시아는 더는 없었다. 글라시아는 더 이상 스노우를 보려 하지 않았다. 스노우가 오해를 풀고자 몇 번이나 글라시아를 찾아갔지만, 글라시아는 만나주지 않았다. 가끔 피할 수 없는 공식 행사나, 어쩔 수 없이 이야기할 때는 철저하게 공적인 모습만을 보여주고, 시기와 증오 어린 눈빛만을 보였다.
스노우 주위도 변화했다.
왕궁 내의 신하들이나 귀족들의 태도가 변화했다. 이전까지는 모두가 스노우에게 호의적인 눈빛을 보냈다. 섬기는 왕의 자식이자, 아직 어린아이.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누군가는 스노우에게 적의 어린 눈빛을 보냈다. 누군가는 스노우에게 의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누군가는 스노우에게 다가오려고 아이인 스노우가 듣기에도 티가 나는 아부와 아첨을 일삼았다.
왕위계승자로 채택된 후로, 스노우의 방에는 늘 방문자가 있었다. 하지만 스노우는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며, 비로소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배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스노우의 일상도 변화했다.
성안을 걷고 있으면, 갑자기 머리 위로 물병 같은 것들이 떨어지는 일이 생겼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으면, 누군가가 민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발을 헛딛는 일이 생겼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말을 타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올라타자, 말은 갑자기 미친 듯이 날뛰어 하마터면 땅에 떨어질 뻔했다. 식사를 하고는 정체불명의 고열과 배앓이를 해, 고비를 넘긴 일도 있었다.
스노우는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무슨 뜻인지. 누구의 짓인지.
어느 날, 스노우는 사냥에 따라가게 되었다. 성에서 떨어진 곳에 도착하자, 사냥꾼은 스노우를 죽이기 위해 글라시아에게 고용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아직 어린 스노우를 불쌍하게 여긴 사냥꾼은, 지금 성을 떠나면 스노우는 죽은 것으로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글라시아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냥꾼이 한 말은 그저 확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원인도 스노우는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스노우는 소문으로 듣고 있었다. 글라시아가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의 방에서 마법의 거울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소문을. 글라시아가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의 방에서 여러 마법과 마법약 을 실험하고 만든다는 이야기를.
계승식의 날, 글라시아는 거울 안의 악마에 대해 이야기 했다. 스노우는 어려서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절망한 영웅에게 사악한 악마나 마녀가 유혹을 속삭이며 타락시키는 이야기들이었다. 스노우는 어쩌면 글라시아 역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원했던 왕위를 동생에게 빼앗긴 글라시아의 약해진 마음을, 분명 그 악마가 유혹한 것이리라.
그렇지만 스노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왕에게 이야기한다면, 왕은 글라시아를 쫓아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왕위를 노리는 누나와 정말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과연 왕이 자신의 말을 믿어줄까. 글라시아와 마법의 거울 이야기는 이제 성안에서는 비밀도 아니었다. 아직은 뜬소문에 불과하지만, 왕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왕은 글라시아에게 그 사실을 확인하거나 조사하려 들지 않을까.
ㅡ그리고 운명은 바꿀 수도 없고, 바꿔서도 안 되는 것이다.
문뜩, 스노우는 왕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왜인지, 스노우는 답을 알 것 같았다. 왕에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느꼈다.
스노우는 누나와 화해하고 싶었다. 이대로 견디면, 견뎌내면, 차라리 언젠가 자신이 왕위에 올랐을 때 사실을 털어놓고 누나를 왕으로 추대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스노우는 깨달았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스노우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왕이 되고 싶다는 욕심은 없다. 자신이 떠나면 왕위는 글라시아가 원하던 대로, 글라시아에게 돌아갈 것이다. 자신은 어딘가에서 조용히 살아가면 된다.
유일한 걱정은, 누님이 정말 거울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스노우는 누님을 구해주고 싶었다. 누님이 거울의 유혹에 넘어간 거라면, 거울을 없애고 사실을 털어놓으면 글라시아와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라시아가 자신에 대한 의심을 버리고, 글라시아가 왕이 되어 기쁘다는 말에 자신을 용서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노우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강력한 마력을 가진 글라시아에게 대항할 방법도, 악마가 깃들었다는 마법의 거울을 없앨 수 있는 방법도 모른다. 스노우에게는 그것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스노우가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는 그것이기도 했다.
어딘가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사람을 찾으러 가는 것이다. 스노우는 거울에게 조종받는 누나를 버리고 떠나는 게 아닐까, 하는 자신의 불안과 죄책감을 그렇게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여러 생각과 고민을 가진 채로, 스노우는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다녔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 글라시아가 자신을 놓아준 사냥꾼을 처벌하거나, 자신을 암살할 다른 이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스노우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버려진 광산 근처의 오두막이었다. 그 오두막에는 일곱 난쟁이가 살고 있었다.
일곱 난쟁이는 집에 멋대로 들어온 스노우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 같았다. 놀란 것은 스노우의 쪽이었다. 일곱 난쟁이는 어렸을 적 들은 수많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왕국의 전설이었다. 영웅들을 돕고, 그들을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스노우는 일곱 난쟁이라면 글라시아를 마법의 거울에게서 구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스노우는 일곱 난쟁이에게 사정을 털어놓으려 했지만, 어떻게 안 것인지 이미 일곱 난쟁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깜짝 놀라는 스노우에게, 일곱 난쟁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스노우는, 언젠가 왕이 말했던 ‘운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일곱 난쟁이는 세계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 세계는, 사실 이야기의 안이라는 비밀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스노우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세계이고, 스노우는 그 주인공이라고 일곱 난쟁이는 스노우에게 말해줬다. 스노우는 가족 때문에 성에서 쫓겨난 뒤, 사악한 마녀가 된 가족을 무찌르고 성으로 돌아갈 운명을 타고났다고 들려줬다.
그것이 이 세계의 목적이자 ‘운명’. 그리고 일곱 난쟁이는 그 ‘운명’이 올바르게 이루어지도록 그런 진실을 알고 관리하는 ‘현자’라고 했다.
그렇기에 일곱 난쟁이는 스노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일곱 난쟁이는 스노우의 운명은 성으로 돌아가 누나, 글라시아를 싸워 물리치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 스노우는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이 세계가 이야기라는 것도, 그런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스노우는 일곱 난쟁이의 말을 부정하며, 자신은 그저 이곳에서 조용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아니, 스노우는 오히려 일곱 난쟁이에게 부탁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누나와 싸우고 무찌르는 운명 대신, 원하던 대로 누나와 평화롭게 살 방법을 찾기 위해 스노우는 일곱 난쟁이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설득된 것은, 오히려 스노우의 쪽이었다.
스노우는 글라시아를 싸워 물리쳐야 한다는 운명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글라시아가 거울 속 악마에게 조종당하고 있고,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른다면 누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본디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사람을 찾고자 하는 여행이었다. 스노우는 스스로에게 들려주던 변명이 사실이 된 것에, 속으로 감사했다. 조종당하는 누나를 버려두고, 목숨을 부지하고 싶어 도망친다는 사실에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던 죄책감도, 힘을 길러 언젠가 마법의 거울에게서 누나를 구해낸다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스노우는 일곱 난쟁이와 만난 것이 운명이라는 말에 기쁨까지 느꼈다.
스노우는 수련을 시작했다. 누나와의 싸움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맞서 싸울 힘을 키워야 했다. 글라시아는 태어나면서부터 강력한 마술사였으며, 대항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런 글라시아에 맞서 싸우기 위한 훈련은 혹독했다.
“일어나거라.”
기절해있던 스노우에게 물을 뿌리며, 일곱 난쟁이는 감정 없이 그렇게 말했다. 어느새 스노우는 일곱 난쟁이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이 정도로 정신을 잃으면 위치 퀸을 쓰러트릴 수 없다.”
위치 퀸. 그것이 일곱 난쟁이가 글라시아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일곱 난쟁이는 그것이 글라시아가 ‘언젠가 갖게 될 이름’이라고 했다.
일곱 난쟁이는 스노우에게 검술을 가르쳤다. 위치 퀸의 마법에 맞설 방법을 가르쳤다. 그들이 가진 지식으로, 강력한 무기를 만들 기술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 어느 것에서도 스승과 제자의 인간적인 교류는 없었다. 스노우는 일곱 난쟁이가 자신을 가르치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럴 운명이기 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스노우는 외로웠다. 하지만 외로움에 익숙했다.
성에 있던 시절에도 창밖으로 신하의 자제들이 뛰어노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왕자로서 스노우는 그곳에 낄 수 없었다. 일곱 난쟁이의 수련을 받으며 생필품을 사러 마을에 들렸을 때도, 또래의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운명이 있는고로 스노우는 그곳에 낄 수 없었다. 스노우에게 있어서 친구란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존재였다.
시간이 지났다. 스노우는 아버지인 선왕이 붕어한 것을 알게 되었다. 글라시아는 왕위를 잇고, 그 강력한 마법의 힘으로 ‘위치 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고 들었다. 스노우는 결국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위치 퀸은 처음에는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렸다. 사람들은 글라시아를 칭송했던 것처럼 왕이 된 위치 퀸도 칭송했다. 스노우는 글라시아에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람들의 평가는 악담으로 바뀌었다. 소문으로 스노우는 위치 퀸이 자신의 마법거울을 통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마법 거울의 말만 듣는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스노우는 왕위계승식의 날, 위치 퀸이 타국에서 얻은 악마가 깃들었다는 마법 거울 이야기를 했던 것을 떠올렸다.
“때가 됐다.”
어느 날인가, 일곱 난쟁이는 스노우에게 그렇게 말했다. 스노우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이 세계의 운명에 따르면, 위치 퀸은 직접 변장을 하고 스노우에게 독이 든 사과를 먹인다고 했다. 스노우는 그 사과를 먹고 죽은 듯한 잠에 빠지지만 이윽고 깨어나, 위치 퀸에 맞서 싸워 왕에 오른다고 전해 들었다.
“스승님.”
자신을 부르는 스노우의 말에, 일곱 난쟁이는 걸음을 멈췄다. 평소 스노우는 스승의 말에 토를 달지도 않았고, 스승에게 질문하는 일도 드물었다.
“정말, 누님과 싸워 누님을 쓰러트리는 방법뿐입니까?”
“누님이 아니라 위치 퀸이다.”
일곱 난쟁이는 스노우의 말을 싸늘한 목소리로 정정했지만, 스노우는 따르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일곱 난쟁이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결심한 일이었으니까. 차분하지만 물러서지 않겠다는 감정을 담아 일곱 난쟁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누님이 이전에 들려주셨습니다. 마법의 거울 안에는 악마가 산다는 소문을요. 어쩌면 누님은 그 마법의 거울에 조종당하고 계신 것 아닐까요. 거울을 제거하면, 누님도 원래대로 돌아오실 수 있지 않을까요.”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고작 그런 것이구나.”
스노우의 말에 일곱 난쟁이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 사실이다. 마법의 거울에는 악마가 살고 있으며, 위치 퀸을 조종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겠지.”
“그렇다면…!”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스노우의 말을 끊으며, 일곱 난쟁이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것을 포함해 ‘운명’인 것이다. 위치 퀸이 마법의 거울을 손에 넣는 것도, 그 안의 악마에게 유혹당한 것도,
그리하여 폭군이 된 것도, 모두 ‘운명’의 일환이다. 바꿀 수 없고, 바꿔서도 안 되는 운명 말이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스승의 말에, 스노우는 대꾸하려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선왕에게 자신에게 물려주려던 왕위를 글라시아에게 물려주라고 할 때에도, 일곱 난쟁이에게 세상의 진실을 알았을 때도, 스노우는 저항하려 했다.
이제야 스노우는 ‘운명’이라는 것의 무게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스노우는 왕이 자신에게 운명을 들려줬을 때를 기억해냈다. 그때 왕은 갑자기 늙고 지쳐 보였다. 아아, 그래서였구나. 스노우는 이제야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세계가 정녕 이야기이고 모든 운명은 정해져 있다면, 스노우가 무작정 도망친 끝에 스승인 일곱 난쟁이를 만난 것도 운명이리라. 그리고 그 덕분에 글라시아에게, 위치 퀸에게 맞설 힘을 갖게 된 것도 운명이었다.
마찬가지로 글라시아가 마법의 거울을 손에 넣는 것도, 그 안의 악마에게 유혹당한 것도, 왕위를 빼앗기고 스노우를 원망하며 폭군이 된 것도 운명인 것이다. 바꿀 수도 없고, 바꿔서도 안 되는 운명. 스노우는 그 부술 수 없을 것 같은 벽 앞에, 그 벽을 지키고 서 있는, 또 다른 벽과 같은 스승의 모습에, 결국 입을 닫았다.
그리고 정말 며칠 되지 않아, 늙은 노파가 사과를 사라며 오두막에 있던 스노우를 찾아왔다.
누님. 스노우는 그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장이라는 것을 몰랐어도, 스노우는 노파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글라시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손에 독이 든 사과를 쥔 채, 스노우는 생각했다.
지금, 솔직하게 말하면 어떨까.
누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은 왕위에 오를 생각이 없다고, 그건 모두 오해였다고. 화해의 손을 내밀면 위치 퀸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노우는 알고 있었다. 만약 정말 위치 퀸, 아니 글라시아가 왕이 되고 싶었을 뿐이라면, 이런 외딴곳에 사는 자신을 찾아올 리가 없다는 것을. 글라시아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정말 그런 운명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스노우는 했다.
이것이 운명이라는 것인가. 스노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저 사과를 한 입 물었다.
스노우는 깊은 잠에 들었다.
ㅡ아, 그렇구나.
스노우는 깨달았다.
ㅡ이게 주마등이라는 것이구나.
스노우는 눈을 떴다.
눈 앞에 보이는 건, 두 명의 얼굴.
옛 기억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인지 순간 누구인가 싶었지만, 잠에서 깬 스노우는 둘을 기억할 수 있었다.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는 신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훌쩍거리는 피터. 이곳, 라이브러리 월드에 와서 알게 된 또래들이었다.
“아, 일어났구나.”
몸을 일으키자, 신디는 스노우가 깨어난 걸 눈치챘는지 말했다.
“괜찮아? 정신이 좀 들어?”
여전히 조금은 멍한 채로 스노우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누워있는 스노우를 주변으로 놓여있는 꽃들. 스노우는 어쩐지 낮익은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사과를 먹고 잠에 든 스노우는 이런 꽃밭에서 정신을 차렸다. 스노우가 깨어나기를 기원하는 일곱 난쟁이와 백성들이 만들어둔 화관(花棺)이었다.
신디는 상황을 좀 설명해야겠다는 듯, 자신은 관계가 없고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양팔을 살짝 벌린 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일단, 숨은 쉬길래 가까운 병원에 연락하고 봤더니 둘 다 사라져서… 찾아내고 보니 이러고 있지 뭐야…”
“나, 나는… 죽은 줄 알고…”
피터는 신디의 말에 설명하듯 말했다. 여전히 눈물이 글썽거리고,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스노우는 신디가 말한 ‘둘 다 사라져서’ 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
“장례식을 치러주려고 꽃이 많은 곳으로 데려온 거였는데…”
“하여간, 재수 없게 장례식부터 생각해?”
신디는 피터의 행동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야기 하다 보니 슬퍼졌다는 듯 엉엉 우는 피터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으며 말했다. 피터는 아프다는 듯, 이제는 슬픈데 더해 서러워졌다는 듯 더욱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아, 맞아. 스노우는 기억을 떠올렸다.
라이브러리 월드로 온 뒤, 스노우는 늘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라이브러리 월드. 모든 이야기가 모이는 세계. 마침내 위치 퀸과의 싸움을 끝내고, 스노우가 정신을 차린 곳은 그런 낯선 세상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것은,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스승 일곱 난쟁이었다.
일곱 난쟁이는 영문을 묻는 스노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했다.
스노우의 세계가 어떤 이야기 속이었던 것처럼,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각자의 세계로서 각자의 ‘운명’을 가지고 있고, 그 운명을 마치면 하나의 세계로 모인다. 그곳은 모든 이야기들이 모이는 세계.
그곳이 바로 이곳, ‘라이브러리 월드’라고 했다.
원래, 스노우가 마침내 위치 퀸을 쓰러트림으로써 스노우의 이야기, 운명은 완성되고 이곳, 라이브러리 월드로 오게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위치 퀸은 마법의 거울 속 악마의 도움을 받았는지 그 흐름을 탈출했고, 스노우의 이야기, 세계를 관리하는 ‘현자’였던 일곱 난쟁이는 스노우를 데리고 위치 퀸을 쫓아 이곳, 라이브러리 월드로 왔다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나를 7D라고 부르거라.”
위치 퀸의 야망은 끝나지 않았다. 스노우는 위치 퀸이 어둠 속에서 암약하며, 라이브러리 월드에 모인 악당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모아 움브라’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D는 그들의 목적은 라이브러리 월드를 지배하고, 나아가 모든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이라 스노우에게 알려줬다.
스노우는 그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이야기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승인 7D와 함께 라이브러리 월드에 기업 ’7D’를 설립한 스노우는, 스승과 자신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기업 7D를 순식간에 라이브러리 월드 전체에서 가장 큰 회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기술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7D는 움브라를 막기 위해 싸웠다. 이야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운명’을 완수하기 위해.
하지만 그 일은 쉽지 않았다. 스노우는 매일 같은 격무에 점점 지쳐갔다. 그 탓인지,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것을 스노우는 기억해냈다.
아니, 지쳐간 것은 격무 때문 만은 아니었다. 스노우를 좀먹고 지치게 만든 것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 정도로 몰아붙인 것은 스노우 자신이었다.
그때, 마침내 위치 퀸과의 마지막 싸움의 순간, 스노우는 마법의 거울을 없애지 못했다.
“그만 포기하세요, 누님!”
스노우의 외침에, 위치 퀸은 일어나며 스노우를 바라봤다.
“후후, 후후후… 포기하라고?”
위치 퀸의 스산한 웃음소리는, 온갖 함성과 창칼이 부딪치는 소란스러움 사이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스노우의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스노우와 위치 퀸의 싸움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위치 퀸이 건네준 독사과를 먹고, 스노우는 잠에 들었다. 위치 퀸은 마침내 스노우가 사라지자 더더욱 폭정을 일삼았고, 백성들은 그런 위치 퀸에 대한 불만이 점점 쌓여갔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 스노우는 잠에서 일어났다.
스승이 건네준 봉인된 전설의 검을 들고 나타난 스노우의 모습에, 백성들은 선왕이 선언했던 진정한 왕, 스노우가 돌아왔다고 기뻐했다. 그들은 왕궁으로 향하는 스노우와 함께 했고, 마침내 왕성에서 마지막 싸움이 시작됐다.
왕궁에는 성난 백성들이 들이닥치고, 끝까지 위치 퀸에게 충성을 다하던 병사들이 어떻게든 그들을 막아내려 했지만,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들 사이로 몰래 숨어들어온 스노우는 마침내 위치 퀸과 독대하여, 서로의 검과 마법으로 이어진 결투도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치 퀸의 마법으로 부서진 벽 너머로, 하늘이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며 새벽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포기하라니, 감히 네가 그런 말을 해!”
위치 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스노우를 쏘아보더니, 그렇게 외치며 마법의 거울을 통해 마법을 날렸다. 훈련의 성과로 스노우는 어렵사리 마법 광선을 피하고 막아낼 수 있었다.
“네가 모든 것을 내게서 빼앗아갔잖아! 난 내 것을 되찾으려 할 뿐이야! 그런데 네가 나에게 포기하라고 해? 감히 네가! 윽!”
표독스럽게 외치며 스노우를 향해 마법을 쓰던 위치 퀸은 통증 때문인지 다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 앉았다. 스노우와의 결투로 위치 퀸의 몸은 이미 상처 투성이었다. 스노우는 그런 위치 퀸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운명은 바꿀 수도 없으며, 바꿔서도 안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배워왔으니까.
“누님…”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스노우는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사실을 털어놓으면, 왕위는 위치 퀸이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된다고 하면, 이 싸움을 멈출 수 있을까.
스노우는 믿고 싶었다. 위치 퀸은 그저 마법의 거울에 조종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마법의 거울만 제거하면, 다시 원래의 누님으로, 글라시아로 돌아올 거라고. 그럼 서로의 오해를 풀고, 화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단지 스노우 본인이 누님에게 미움받는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러면 좋겠다는 희망을 핑계로 대고 있을 뿐이라면. 이 모든 것은 스승인 일곱 난쟁이의 말대로, 운명대로 흘러갈 뿐이라면.
냉정하게 생각하면, 글라시아에게는 스노우를 미워할 이유가 충분했다.
스노우는 알고 있었다. 글라시아가 어떻게 생각할지를. 수 년 전, 계승식의 날부터 스노우는 생각했다. 글라시아의 시선에서는 자신이 머나먼 나라로 싸우러 갔을 때, 스노우가 아버지인 왕에게 왕위를 졸랐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까지 아끼던 동생이, 언제나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돕고 싶다고 했던 동생이, 자신이 없는 곳에서는 왕위를 차지하려 계략을 품었다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노우는 깨달았다.
지금 위치 퀸이 외치는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었다. 위치 퀸은 거울에 조종당하지 않더라도 스노우를 미워할 이유가 충분했다. 마법의 거울 같은 것이 없었다고 해도, 그 안에 악마가 살든, 살지 않든, 위치 퀸은 모든 것을 빼앗은 동생 스노우를 증오할 이유가 충분했다.
스노우는 잊고 싶었던 그 사실이, 너무나도 두렵고 괴로웠다.
언젠가 누님이 거울에 조종당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구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힘이 없다는 이유로, 누군가 도움을 청할 사람을 찾겠다는 핑계로 도망쳤을 때처럼. 그때부터 나는 도망쳤던 게 아닐까. 누님은 거울에 조종당한다는 핑계로. 이것이 운명이라는 핑계로.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나야말로, 내가 진짜 ‘주인공’에 어울려!”
위치 퀸은 마치 자신에게 들려주듯 그렇게 외치고, 몸을 일으켜 싸울 준비를 갖췄다. 그 모습에 상념에 빠져있던 스노우도 검을 고쳐 쥐었다. 스노우는 알 수 있었다. 분명, 이것이 서로 마지막 공격이 될 것이라고.
“...알겠습니다, 누님. 이제 끝을 내지요.”
스노우는 결국 받아들였다. 다시 그때로, 서로 장난을 치고 허울 없는 모습을 보여주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스노우는 검을 들고, 위치 퀸은 마법의 거울을 향해, 둘은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ㅡ
그리고, 스노우는 지금 이곳에 있었다. 또다시, 위치 퀸과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 이야기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정말 누님이 거울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야기 속에서 못 다 이룬 소원을, 이번에야말로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목표를 이루려 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마음은 초조했다. 위치 퀸이 이곳, 라이브러리 월드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그리고 막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운명’을 가진 스노우 뿐이었다. 그렇지만 움브라와 위치 퀸을 막을 방법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스노우는 외로웠다.
생각해보면, 스노우는 늘 혼자였다.
성에서 지내던 시절도 스노우는 혼자였다. 스승인 7D와 보내던 시절도 스노우는 혼자였다. 스노우를 지지하던 백성들과 함께 싸우던 시절에도 스노우는 혼자였다. 모두들 스노우를 스노우로 보지 않았으니까. 어린 왕자로서의 스노우, 왕위계승자로서의 스노우, 정해진 운명에 따라 위치 퀸을 쓰러트릴 스노우, 영웅이자 왕으로서의 스노우. 그런 스노우의 껍질 안에 있는 진짜 스노우는, 언제나 외톨이었다.
마음을 놓을 곳이 없는 생활에는 익숙했다. 그것이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익숙하고 당연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스노우는 위치 퀸이, 글라시아가 늘 부러웠다. 글라시아에게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과, 그렇게 끌어들인 사람들을 자신의 곁에 둘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건 라이브러리 월드로 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악당들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스노우는 위치 퀸이 악당들을 모아 ‘움브라’ 라는 집단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도, 역시 누님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스노우는 자신은 늘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스승인 7D에게 그런 정을 기대한 적은 없다. 위치 퀸과 움브라에게 맞서 싸우기 위한 동료를 모으고 있지만, 그들 역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대로서 생각한 적은 없었다. 목적을 위해 함께 싸우는 ‘동료’지만, 목표와 관계없이 함께 할 수 있는 ‘동료’ 이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만 좀 울어, 피터! 스노우는 괜찮으니까”
“나, 난 스노우가 죽은 줄 알고…”
“안 죽었으니까 죽었다는 말도 그만해!”
여전히 엉엉 우는 피터와 그런 피터를 달래는지 혼내는지 분주한 신디를 보고 스노우는 ‘풋’하고 웃어버렸다.
“괜찮아. 그냥, 피곤해서 잠들었던 거야. 둘 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스노우는 둘을 향해 웃으며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만난, ‘목표’나 ‘운명’과는 상관없는, ‘동료’가 아닌 ‘친구’.
스노우는 처음으로, 그런 둘과 함께 있을 때면 혼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스노우는 그 둘은 그런 일과 인연이 없도록 하고 싶었다. ‘위치 퀸에 맞서 싸울 스노우’나, ‘움브라를 막아설 7D의 대표 스노우’가 아니라, 평범한 라이브러리 월드에 사는 소년 ‘스노우’의 친구였으면 했다.
동시에 스노우는 그렇기에, 위치 퀸과 움브라를 막아서고 싶었다. 누님의 야망이, 움브라의 악행이 친구인 피터와 신디에게 닿지 않도록. 둘이 라이브러리 월드에서 머무는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언젠가 이 모든 일이 끝나고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갈 때까지, 그들을 지켜낼 수 있도록.
스노우는 처음으로 외롭지 않았다. 처음으로 누님과 싸우는 것이 망설여지지 않았다.
지금의 스노우는 싸워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