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이야기를 들려줘요.”
볼프강은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어느 화창하던 날이었다.
볼프강은 자신이 언제부터 ‘나쁜 늑대’ 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희미해지는 기억의 시작을 더듬더듬 찾아 올라가면 도달하는 가장 첫 기억에서도 자신은 나쁜 늑대였고, 기억나는 모든 기간에 걸쳐 나쁜 늑대였다. 볼프강은 나쁜 늑대가 아니었던 자신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만큼 볼프강은 아주 오랫동안 나쁜 늑대였다.
그 오랫동안, 나쁜 늑대로서 볼프강은 여러 일을 해왔다.
여섯 마리나 되는 아기 염소들을 잡아먹기도 했으며, 돼지 삼 형제 중 둘의 집을 부수기도 했고, 산속의 할머니와 그 손녀를 잡아먹기도 했으며, 양치기를 몇 번이나 속여 양들을 잡아먹기도 했다. 그 외에도 셀 수도 없는 일들을 해왔다.
결말들은 그리 좋지 못했다.
볼프강은 배가 갈려, 돌멩이를 가득 채운 채 우물에 빠지기도 했으며, 굴뚝으로 돼지의 집에 들어가다 뜨거운 물에 빠지기도 했고, 사냥꾼에게 쫓기다 총에 맞거나 활에 맞거나 함정에 걸리거나 하는 일도 많았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시간이 지나면 볼프강은 멀쩡한 몸으로 다른 곳에서 정신을 차리고는 했고, 또다시 나쁜 일을 저지르기 위해 길을 떠났다.
볼프강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신이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과, 그 이야기들을 오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볼프강은 그런 것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볼프강은 그저 자신의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나쁜 늑대로서의 본능에.
볼프강은 여러 이야기를 오고 가며 나쁜 늑대로서 온갖 일을 저지르고 다녔다. 사람들은 볼프강을 두려워했고, 아이들은 늑대가 온다는 말에 공포에 질렸다.
이야기들 속에는 다른 늑대들도 있었다. 그들은 반대로 볼프강을 존경하고 따랐다. 젊었던 볼프강은 자신을 추켜세우는 것은 싫지 않았다. 볼프강은 어느새 나쁜 늑대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자신이 오랫동안 경험하고 느꼈고 배워왔던 것들을 알려주곤 했다.
하지만 다른 늑대들은 볼프강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볼프강은 어느 순간부터 다른 늑대들을 한심하다고 생각해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늑대들은 오히려 그런 볼프강을 멋있다고 더욱 존경하며 따랐다. 사람들에게 그러듯, 볼프강은 그런 반응도 신경 쓰지 않았다.
볼프강은 언제나 자신의 본능에 충실할 뿐이었다. 다른 등장인물들을 잡아 먹어 허기를 채우는 것.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도, 의무나 사명감에 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본능에 따라 자연스럽게 행동할 뿐이었다. 어쩌면 그러는 것이 자신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볼프강은 어렴풋이 하곤 했다.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볼프강은 생각했다.
그저 한 마리의 늑대에 불과했던 볼프강은, 오랜 시간이 남겨준 경험과 지혜로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역할을, 운명을 따르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볼프강은 승리하는 역할이 아니었다. 언제나 볼프강은 모두를 잡아먹으려다 마지막 순간 실패하고 응징당하는 역할이었으며, 사람들은 그렇게 볼프강이 비참한 모습을 맞이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야기의 다른 악당들은, 나쁜 늑대의 역할을 하는 다른 늑대들은 라이브러리 월드로 돌아가면 원래대로 돌아가곤 했다. 그렇지만 볼프강은 그렇지 않았다. 볼프강은 자신의 회색 털이 점점 하얗게 새어가는 것을 눈치 챘다.
볼프강은 알게 됐다. 다른 늑대들에게는 소속된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시간을 따른다. 하지만 볼프강은 이야기들을 떠돌아다닌다. 이야기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만의 시간을, 어쩌면 라이브러리 월드 그 자체의 시간을 따른다. 법칙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볼프강은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과 역할이라면, 본능이 이끄는 것이 그런 결말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볼프강은 자신의 생활에 질려갔다.
한 마리의 늑대였다면,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볼프강은 이제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해왔는지 명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볼프강은 그런 자신의 삶을 돌아봤다.
이유도 모를 본능에 충실한, 그리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삶이었다. 그렇지만 돌아보니, 그 안에서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삶이었다.
두려운 나쁜 늑대를 모두가 꺼려했고, 다가오는 것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 이들. 자신이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과 다른 이야기로 넘나들 수 있는 능력에 한때는 이야기들을 관리하는 ‘현자회의’가 다가왔지만, 그들 역시 그저 악행을 저지를 뿐인 볼프강이 무언가를 관리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떠나갔다.
볼프강은 그 판단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말한 대로,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것은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상처입히는 것뿐이었으니까.
다만,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렇게 사는 걸까. 남기는 것 없이, 돌아보면 공허한 이 삶을 계속하는 걸까. 그러다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지는 걸까. 대신할 늑대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볼프강은 다만 그 의문의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며 이야기를 떠돌고, 나쁜 늑대로서 살아가고, 부상을 입고 쓰러진 어느 날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푹신한 감촉에, 볼프강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다. 그 행동의 탓에, 상처를 입었던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신음을 흘리며 자신도 모르게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대던 볼프강은, 눈앞의 광경에 놀랐다.
상처 위에 감겨있는 붕대. 시커먼 털이 수북한 몸을 덮은 이불. 어느 것도 볼프강은 보기만 했을 뿐,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고개를 들자, 하늘은 막혀있었다. 어느 집의, 어느 방 안이었다. 깨어났을 때부터 느껴지는 낯설지만 나쁘진 않은 감촉에 돌아보자, 볼프강은 자신이 난생 처음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 일어났나요?”
볼프강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볼프강은 재빨리 이불을 걷어 치우고 발톱을 뽑아 대항하려 했지만, 볼프강은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느낀 감정에, 볼프강은 스스로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겪는 일이 너무 많아서일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때문에 자신이 이상해진 걸까? 채 몇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사이에 볼프강이 고민하는 사이, 상대는 방 안으로 들어와 모습을 드러냈다.
빨간색 테두리의 안경을 낀, 나이가 든 여성이었다.
차분한 느낌의 오렌지 브라운 색의 머리카락. 안경보다 선명한 붉은 숄을 어깨에 두른 여성은, 간호하려는 것인지 물병과 간단한 요깃거리가 있는 접시를 들고 있었다.
볼프강은 여성이 비명을 지를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나쁜 늑대니까. 볼프강은 여태껏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방 안에서 깨어났음에도, 상처를 누군가 치료해줬음에도 여성이 자신을 돌봐줬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볼프강의 예상과는 다르게, 여성은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한 어중간한 자세인 볼프강의 침대 옆에 앉았다.
“걱정했어요. 삼일이나 눈을 뜨지 못해서요. 깨어나서 다행이네요. 몸은 좀 어떤가요? 늑대를 치료한 적은 없어서 잘 치료했는지 모르겠는데.”
볼프강은 다시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삼일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니. 언제나 쫓기고 위협을 받던 볼프강의 처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여성의 반응을 볼프강은 이해할 수 없었다.
눈 앞에 크고 사나운 늑대가 있는데, 이 사람은 비명을 지르지도 도망치지도 않는다. 아니, 오히려 상처 입고 쓰러진 자신을 데리고 와서 치료하고 돌봐줬다고 한다. 그 모든 것이 볼프강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볼프강은 오히려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볼프강이 이를 드러내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음에도, 여성은 딱히 볼프강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볼프강은 여성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한참을 지켜본 끝에야 입을 열었다.
“...우선, 도와준 것은 감사하지.”
“어머.”
볼프강의 말에 여성이 놀랐다는 듯 말했다. 자신이 말하자마자 보인 반응에 볼프강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여성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늑대가 말을 할 줄은 몰랐거든요.”
“그거 미안하군. 나는 보통 늑대가 아니라 나쁜 늑대라서 말이지.”
볼프강은 으르렁 거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여성은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는 듯, 그저 준비해온 물과 음식을 볼프강에게 내밀었다.
“그렇군요. 오랫동안 잠들었으니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플 것 같아서, 적당히 가져왔어요. 모자라면 더 있으니까, 얼마든지 말해요.”
볼프강은 점점 알 수 없어졌다.
여성은 볼프강의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아! 늑대니까 역시 고기를 좋아하실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지금 집에 있는 게 없어서요. 일단은 다쳤다고 생각해서 수프를 만들었는데… 혹시 고기 말고는 못 먹나요?”
“무슨 생각이지?”
볼프강은 여성의 말을 무시하며 물었다.
“나쁜 늑대를 조심하라는 이야기, 들어본 적 없나?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같은 건 한 입에 꿀꺽 하고 삼킬 수도 있는데.”
“하지만 아직 나쁜 짓을 하지 않았잖아요.”
여성은 웃으며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래도 역시, 한 입에 꿀꺽 하고 삼키는 건 그만둬 줬으면 하네요. 아직 잡아먹히고 싶진 않거든요.”
여성은 농담이라는 듯 말하고는, 식사하고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는 방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볼프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 조금 지난 뒤에야 여성이 남기고 간 물과 그릇에 코를 가까이 해 냄새를 맡아봤다.
킁킁. 독은 들어있지 않았다.
볼프강은 더욱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볼프강은 ‘친절’이라는 것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나쁜 늑대인 볼프강과는 인연이 없었던 것이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이 자신에게 ‘친절’을 준 것은 볼프강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독이 들어있지 않은 수프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언젠가 어느 집에 숨어 들어가 맛봤던 것과 비슷한 냄새였다. 볼프강은 요리를 먹어본지 오래 됐다.
수프는 아직 따뜻했다.
상처가 나을 때까지, 볼프강은 여성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이야기에서 생긴 상처나 피해는, 라이브러리 월드로 돌아가면 회복된다. 그렇지만 이번에 볼프강이 입은 상처는 그렇지 않았기에, 볼프강은 어딘가에서 상처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금 다른 이야기에서 ‘나쁜 늑대’로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볼프강의 입장에서는 어디든지 상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무도 없는 숲 속의 깊은 곳이 더욱 좋았다. 하지만 여성은 상처 입은 볼프강이 떠나겠다는 것을 말렸다.
“그런 몸으로 가면 위험해요. 상처가 나으면 가시죠.”
“가까이 오면 후회할 거다.”
볼프강은 쫓기고 있었다.
후회할 거라는 말은 볼프강에게 가까이 오면 후회할 거라는 말이기도 했지만, 볼프강을 추격하는 이들이 다가오면 후회할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라이브러리 월드의 규칙이란, 라이브러리 월드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였다.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정해진 대로 따라가는 것이며, 이야기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반복되고, 이야기가 끝나면 라이브러리 월드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야기의 흐름이 무너질 테니까.
그렇기에 현자회의는 그 규칙을 철저하게 숨겨왔다. 이야기를 관리하기 위해, 그 줄거리를 지키기 위해 이야기에서 한 명씩 뽑힐 ‘현자’는 엄정한 심사를 통해 자질을 보고 뽑았으며, 간혹 규칙을 깨닫게 되는 이들은 현자회의에 영입했다.
영입되지 않거나 영입할 수 없는 이들을 현자회의는 추적했다.
하지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볼프강이 털어놓아도, 여성은 걱정 않는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요. 여긴 깊은 산 속의,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니까요. 절 찾아오는 건 아주 가끔 오는 손녀 정도랍니다. 당신이 상처를 치료할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볼프강은 다시금 여성을 설득하려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사실, 볼프강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으니까.
현자회의의 누군가가 찾아와 여성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볼프강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나선 일이고, 볼프강은 여성에게 ‘친절’을 달라고 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볼프강에게도 숲속에서 홀로 상처를 핥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이쪽이 더 빨리 회복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동안 여성의 집에 머무르게 된 볼프강이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어머나.”
어느 날 아침. 집을 나온 여성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장작을 집 옆 장작더미로 옮기던 볼프강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에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할 일이 없더군.”
어제 밤만 해도 텅 비어있던 장작더미는, 어느새 여성의 키와 비슷할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여성은 미소지으며 장작더미에 마지막 장작을 후두둑 내려놓는 볼프강에게 말했다.
“몸 상태는 좀 괜찮아지셨나요?”
“괜찮다. 그래서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더군.”
“고마워요. 제가 저만큼이나 장작을 패려면 하루로는 부족했을 텐데.”
“‘친절’에 대한 대가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마라. 말했듯이 할 일이 없어 심심했기도 하고.”
볼프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심심하다’는 감정 자체가 볼프강에게는 낯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볼프강의 삶은 둘로 나눌 수 있었다. 본능에 충실한 나쁜 늑대로서의 시간과, 누군가로부터 쫓기거나 도망치는 늑대로서의 시간이었다. 어느 쪽이든 심심하다는 감정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여성의 집에서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는 나날들. 처음 며칠간은 볼프강은 여성이 사냥꾼을 데려오거나, 독약을 먹이고 사냥꾼에게 넘기거나, 혹은 현자회의에서 자신을 쫓아오진 않을까 걱정하곤 했다. 그렇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볼프강은 침대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하고 싶어졌다.
그런 감정을 느껴본 것이 처음이기에 볼프강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볼프강은 몸이 근질거릴 때마다,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혼자 살기에 관리가 잘 되지 않는 여성의 집을 고치기도 하고, 텃밭을 일구는 것을 돕기도 하고, 맛은 있지만 계속되어 질린 수프 대신 숲속에서 토끼나 사슴 따위를 잡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여성은 볼프강이 지붕을 고치러 올라갈 수 있게 사다리를 붙잡아주거나, 함께 텃밭을 일구거나, 볼프강이 잡아온 토끼나 사슴을 맛있는 요리로 만들어 함께 먹곤 했다.
적응이라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따분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딘지 불안했기 때문에 볼프강은 움직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볼프강은 마치 늘 그랬던 것처럼 몸을 움직이게 되었다. 텃밭을 일구고, 오두막을 고치거나 가구를 만들고, 토끼나 사슴을 사냥하고, 숲속이기 때문에 다른 늑대나 곰 같은 맹수가 집으로 다가올 것 같으면 내쫓고는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볼프강은 알지 못했지만, 볼프강의 상처는 어느새 사라졌다.
여성은 볼프강에게 상처가 나았으니 집을 떠나라고는 말하지 않았고, 볼프강은 집을 떠나려 했으나 내일은 삐걱거리는 문을 고칠 생각이었기에, 또다시 내일은 텃밭에서 돌을 골라낼 생각이었기에, 그 다음 날은 불길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기에 집을 떠나지 않았다.
“당신 이야기를 들려줘요.”
어느 화창하던 날이었다.
볼프강과 여성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텃밭을 돌보고, 나무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는 햇빛이 부서졌고, 시원한 바람이 그늘에서 땀을 식히던 몸을 스쳤다.
멍하니 새들이 포로롱 거리며 날아가는 걸 보던 볼프강은 여성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볼프강은 여성과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그녀가 볼프강에 대한 것을 물어본 적은 없었다.
볼프강은 자신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들려줬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나쁜 늑대였고, 여러 나쁜 짓을 하며 돌아다녔다는 정도였다. 여성에게 이 세계의, 라이브러리 월드의 법칙 같은 것을 설명할 생각은 없었기에 여러 이야기를 떠돌아다녔다는 것은 설명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현자회의가 여성을 쫓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저 볼프강은 오랜 시간동안 여러 장소를 다니며 나쁜 늑대로 살았다는 이야기만을 했다.
여성은 다른 장소의 이야기를 궁금해했다. 그래서 볼프강은 그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볼프강은 참으로 오랜 시간동안 여러 장소를 다녀봤다.
울창하게 나무가 자라난 숲속을 뛰어다녔으며, 황금색으로 물든 밀밭을 달려갔다.
쌓인 눈과 내리는 눈이 맞닿아 하늘도 땅도 온통 새하얗게 변해 온 세상이 하얀 설원을 달렸으며, 계속 달리면 푸른 하늘에 도달할 것 같은 끝없는 평원도 달려봤다.
하늘이 담긴 듯한 호숫가를 첨벙거리며 뛰었고, 파도가 부딪히는 모래사장을 달렸다. 굽이치며 몰아치는 강가를, 폭풍우가 치는 산의 미끄러운 돌길도, 흐른 피로 땅이 붉게 물든 진창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집안으로 뛰어드는 벽돌길도 달렸다.
하늘에 닿을 듯한 나무 밑도, 서로 얽히고 섥혀 한 그루로 보이는 거대한 나무 밑도, 푸른 꽃밭도 노란 꽃밭도 모두 달려봤다.
“멋지네요.”
여성은 볼프강의 말을 듣다 말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런 광경을 보고 싶어요.”
볼프강은 하마터면 그러겠냐고 물어볼 뻔 했다.
그 모든 곳들을 이야기 하면서, 그녀가 곁에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기에.
볼프강은 하마터면 여성을 물어뜯을 뻔 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곳에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느낀 소유욕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날뛰는 듯한 본능에.
볼프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야겠군.”
여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냐고도, 이렇게 갑자기 떠나냐고도, 식사라도 하고 가지 않겠냐고도 하지 않았다. 여성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늘 끼고 있던 빨간색 테두리의 안경을 볼프강에게 건네며 여성은 말했다.
“데려가주겠어요?”
볼프강은 물끄러미 여성을 바라보았다.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함께 시간을 보내며 여성의 말투를 이해하게 됐기에, 볼프강은 설명을 기다렸다. 여성은 안경을 양 손으로 잡고 볼프강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볼프강은 허리를 숙여 여성이 하는 일을 마저 하도록 도와줬다.
“오랫동안 이 안경을 끼고 살았죠. 제 눈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그 안경이 당신이 말한 광경을 봐준다면, 내가 본 것이나 마찬가지겠죠.”
“이게 없으면 불편할 텐데.”
“걱정 마세요. 불편한 것은 편하지 않다는 의미일 뿐이니까.”
볼프강의 말에 여성은 웃으며 대답했다. 볼프강은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볼프강은 숲속을 떠났다.
결국 자신은 나쁜 늑대였기 때문에.
한 번은 욕망을 참았지만, 두 번도 참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애당초 영원히 이대로 지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현자회의의 그 고양이는 자신을 찾아올 것이고, 그곳 역시 어떤 이야기의 안이었으니 결국에는 라이브러리 월드로 돌아가고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언젠가 떠나야 한다면 볼프강은 지금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쁜 늑대 볼프강은 세상을 떠돌았다.
시간이 흘렀다.
“어머, 정말 소문으로 듣던대로네요. 설마 싶어서 와보긴 했는데.”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볼프강은 나무를 패려던 도끼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모자를 쓴, 새카만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었다.
볼프강은 그녀가 누군지, 무엇 때문에 자신을 찾아왔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볼프강은 다시 도끼를 들어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말했다.
“은퇴했다.”
“제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당신을 찾아왔는지는 안 물어보시나요?”
턱, 하고 도끼를 반으로 쪼개며 볼프강은 대답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 순간 이후로 안 볼 상대니 굳이 알고 싶지 않다. 무엇 때문에 찾아왔는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 분위기를 보면 현자회의 소속은 아니고, 그렇다면 함께 일할 악당을 찾아온 거겠지. 하지만 말했듯 나는 은퇴했다. 돌아가라.”
장작을 장작더미로 던지는 볼프강에게 방문자는 말했다.
“네, 그건 저도 소문으로 들었어요. 그래서 직접 확인하러 온 거고요.”
턱. 볼프강은 다음 장작을 쪼갰다. 여전히 방문자를 돌아보진 않았다.
“이제 확인했으니 목적은 달성했군. 돌아가라.”
“전설적인 나쁜 늑대, 모두의 존경을 받는 볼프강이 사라졌더니, 알고 보니 은퇴해서 어느 이야기의 산 속에서 지내고 있다… 그것도 어느 할머니의 집에서, 그녀를 잡아먹은 것도 아닌데 말이죠.”
콰직. 볼프강은 양 손으로 들어올렸던 장작을 쪼갰다. 방문자를 바라보며 볼프강은 말했다.
“돌아가라. 아직 그럴 수 있을 때.”
“그러고 보니 자기 소개가 아직이었네요.”
볼프강의 위협에도 방문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저는 위치 퀸. 언젠가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사람이죠. 그러기 위해 볼프강, 당신이 필요해요.”
“이야기기의 주인공이 되기 전에 목숨부터 간수하라고 해주고 싶군. 앞으로 볼 일 없는 상대니 궁금하지 않다고 했을 텐데. 앞으로 보지 않을 방법은 다양하다.”
“그건 알고 있어요. 당신이 한 말도 들었고요. 그렇지만 나는 앞으로 자주 보고 싶은걸요.”
이를 드러내며 위협하는 볼프강의 말을 위치 퀸은 농담하듯 받아쳤다. 위치 퀸. 그 이름만으로도 볼프강은 방문자가 마녀이며 마법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기묘할 정도로 겁이 없는 것을 봐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라이브러리 월드의 진실도 알고 있으니까.
위치 퀸은 볼프강과 오두막을 둘러보며 말했다.
“소박하지만 좋은 곳이네요. 은퇴한 뒤에 조용히 살아가기에 어울리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좀 아쉽지 않나요? 당신 정도라면 훨씬 좋은 곳에 머물 수도 있을 텐데요.”
“관심 없다.”
“할머니가 좋아하시기 때문인가요?”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 찾아온 이유인가?”
이번에는 볼프강의 위협에 위치 퀸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듯, 양 손을 들어보였다. 볼프강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뒤에야 평범한 목소리로 물을 수 있었다.
“왜 나지?”
“나쁜 늑대들을 통솔하는 건, 역시 나쁜 늑대가 제일일 테니까요. 그들 중의 전설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말이죠.”
위치 퀸의 말은 사실이었다. 볼프강은 자신이 나쁜 늑대들 사이에서 그런 존재가 된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신경 쓰지 않았을 뿐.
나쁜 늑대 역시 이야기 속의 존재.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이야기 속의 인물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나쁜 늑대’로만 불릴 뿐, 많은 이야기에 나오는 그들을 구분하거나 개체로 따지는 것이 어려운 점이 그러했다. 그 탓인지, 늑대들은 어렴풋하게 다른 이야기의 존재와, 그 수많은 이야기들을 떠돌며 ‘나쁜 늑대’로서의 역할을 했던 볼프강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자신들은 한 번 하기도 어려운 악행을 수없이 저지르고, 때로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지 알려주는 영웅. 그렇기 때문에 볼프강이 잠적할 때 가장 격렬하게 비난했던 것도 나쁜 늑대들이었으며, 끝까지 추적했던 것도 나쁜 늑대들이었다.
하지만 볼프강 역시, 그렇기에 볼프강이 다시 돌아왔을 때 가장 환영할 이들도 그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볼프강은 나쁜 늑대들이 늑대도 아닌 위치 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늑대들이 너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놈들이 멍청하긴 해도 개가 아닌 늑대다. 늑대는 누군가에게 길들여지지 않아.”
“아뇨. 그 점은 잘못 알고 계시네요. 길들여진 늑대가 바로 개랍니다. 당신이 할머니에게 길들여진 것처럼 말이죠.”
“살아서 돌아갈 생각이 없나보군.”
볼프강은 발톱을 꺼냈다. 오랫동안 꺼내지도 않았고, 쓸 일도 없었음에도 볼프강의 발톱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동안의 길고 많은 싸움으로 더럽혀지고, 상처가 났음에도 햇빛을 받는 발톱은 마치 칼날과도 같았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죠. 최소한 은퇴했다는 당신이 다시 싸움에 나서긴 할 테니까 말이에요. 그쪽이 끝까지 은퇴한 몸이니 어떤 모욕을 들어도 제가 찾아온 이유도 듣지 않고, 싸우지도 않겠다고 하는 게 제일 걱정이 됐거든요.”
위치 퀸의 말에, 볼프강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런 볼프강을 보며 위치 퀸은 말을 이었다.
“알고 있어요. 당신의 마음 속에는 아직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다는 걸요. 그 불꽃을 숨길 수 없었기에 전에도 이 오두막을 떠났었고, 오랫동안 돌아다녔죠. 나쁜 늑대라는 당신의 운명과 역할에 충실하도록.”
그랬다. 볼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과 함께 볼프강은 오두막을 떠나, 또다시 나쁜 늑대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다시 시작된 이야기들을 찾아가 과거에 했던 악행을 또다시 저질렀다.
그렇지만 볼프강의 마음에 찾아온 것은 전과 같은 충족감이나 만족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회의와 실망, 후회 같은 것에 가까웠다.
보람도 목적도 없는 생활. 또다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쫓겨다니는 여로. 지금까지 놓친 만큼 따라잡아오는 현자회의의 마수. 무엇보다 더 이상 볼프강은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았다.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도 즐겁지 않았고, 그 뒤에 따라오는 응징 역시 즐겁지 않았다.
무엇보다 볼프강은 두려웠다.
과거에, 먼 옛날에 자신이 입은 상처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라이브러리 월드로 돌아가도 치료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그것이 자신의 본능을 쫓아, 역할을 다해 맞이한 결과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랬는데.
두려움이란 습관과도 같았다. 한 번 두렵기 시작하자 볼프강은 배가 갈리는 이야기도, 총에 맞는 이야기도, 끓는 물에 삶아지는 이야기도 모두 싫었다. 볼프강은 돌아가고 싶었다.
볼프강은 처음으로 나쁜 늑대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볼프강은 나쁜 늑대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끝내 따라왔던 현자회의의 추격자는 볼프강을 눈감아주기로 했다. 다른 나쁜 늑대들은 볼프강에게 실망하고, 설득하려 하고, 보복하려 했지만, 볼프강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거절하고, 끝내 이겨냈다.
그렇게 볼프강은 돌아왔다. 라이브러리 월드의 다양한 이야기의 여러 곳을 본 뒤, 여성이 기다리는 오두막으로. 여성은 그 사이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볼프강은 마침내 나쁜 늑대가 아니게 되었다.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위치 퀸의 말대로였다. 볼프강의 마음 속에는 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었다. 나쁜 늑대로 만들어진, 나쁜 늑대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는 불꽃. 그것은 본능이기도 했으며 볼프강의 역할이자 사명이기도 했다.
“옛날 이야기다.”
그 본능과 사명을 다시 한 번 삼켜내며, 볼프강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위치 퀸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불만인지 흥, 하고 콧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이미 모든 나쁜 늑대는 제 휘하로 들어오기로 했어요. 나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요. 당신의 사모하는 할머니도 더 좋은 환경에서 좋은 대접을 받을 거고요.”
“네 말대로 지금 나는 길들여진 개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주인은 네가 아니다. 돌아가라.”
볼프강의 대답에 위치 퀸은 그 눈을 한동안 마주했다. 하지만 이윽고 마치 눈싸움에서 졌다는 듯, 위치 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물러났다. 위치 퀸이 손을 들어올리자, 허공에서 마법의 거울이 나타나 빛나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다른 곳으로 향하는 문을 여는 마법의 도구일 거라고, 오랜 경험으로 볼프강은 생각했다.
“알겠어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일단은 돌아가도록 하죠. 하지만 생각이 바뀐다면 환영하겠어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고요.”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거울 속의 다른 공간으로 향하려던 위치 퀸은 볼프강의 질문에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는 위치 퀸에게 볼프강은 물었다.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뭘 할 생각이지? 나쁜 늑대들을 데리고 뭘 할 속셈이지?”
“나쁜 늑대들만 데리고 있는 건 아니랍니다. 모든 마녀들도 제게 협력하기로 했죠. 그 외에도 수많은 악당들이나 등장인물들이 제 편이 되어주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로 뭘 할 생각이지?”
“운명을 바꿀 거랍니다.”
위치 퀸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지금까지 위치 퀸을 보면서 느꼈던 인상과는 전혀 다른 웃음이었다.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웃음 같기도 했으며, 예전에 여성이 짓고는 했던 웃음과도 닮아 있었다.
볼프강이 그 웃음에 홀린 사이, 위치 퀸은 거울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볼프강은 위치 퀸에게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지 못한 것을 가볍게 후회했지만, 이윽고 생각을 고쳤다.
볼프강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으니까.
자신은 위치 퀸과 함께 할 생각이 없다. 이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러니 위치 퀸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든, 누구와 함께 하든 볼프강이 알 바 아니다.
볼프강은 가슴을 얌전히 쓸어내렸다. 어쩌면 위치 퀸의 말에 혹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안에 있는 나쁜 늑대로서의 본능이 깨어났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악당들이 모여 무언가를 저지르겠다는 그 말에 두근거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 상관 없는 이야기다. 볼프강은 고개를 내젓고는, 방금 팼던 장작 몇 개를 들고 오두막 안으로 향했다. 밤 사이 불씨가 죽은 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고, 간단한 식사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왔었나요?”
“신경쓸 것 없다. 길을 잘못 찾아온 사람이었으니까.”
볼프강은 그렇게 대답하고, 침대에 누운 할머니의 곁에 쟁반을 내려놨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할머니를 말리고, 잔기침을 하기에 이불을 끌어올려줬다.
할머니는 병에 걸렸다.
나이가 들어서라고 할머니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지만, 볼프강은 그럴 때마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는 했다. 볼프강은 말했다.
“미안하군. 의사라도 불러올 수 있으면 좋겠는데.”
“신경 쓰지 마세요.”
볼프강의 말에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볼프강은 아쉬움을 어쩔 수 없었다. 그야 이런 산 속까지 귀한 의원이 와줄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자신이 늑대가 아니라면 마을에 가서 이야기라도 해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무리다. 말하는 늑대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시골 마을의 순박한 사람들에게 늑대는 양들을 물어죽이고 아이들을 위협하는 두려운 상대다.
볼프강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몇 번인가 숲을 내려가 마을 주변에서 얼쩡거린 결과, 오히려 숲에는 늑대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아 아무도 오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나마 그 결과 할머니가 아프다는 사실을 마을의 가족들에게 알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볼프강은 그 점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잘 먹고 푹 쉬면 나을 거예요.”
할머니는 볼프강의 표정을 읽었는지 그렇게 말했다. 털이 가득한 자신의 손을 쓸어내리는 할머니의 손을 보며 볼프강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손녀가 온다고 하지 않았나?”
“네. 며칠 전에 딸이 왔다 가면서 그러더군요.”
“그 날은 내가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군.”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요.”
할머니는 손을 빼려는 볼프강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귀여운 손녀를 자랑하려는 듯.
“제가 만들어준 빨간 모자를 쓴, 정말 귀여운 아이랍니다. 아직 털이 푹신한 걸 좋아하는 나이니까, 당신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할머니의 웃음에 볼프강 역시 웃었다. 볼프강은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알고 있었던 사실이니까. 볼프강은 할머니의 식사를 돕고, 남아있던 약을 먹이고 잠재우고, 오두막을 떠나 숲속에 있는, 생각할 때 쓰는 볼프강만의 장소로 향했다.
운명이라.
위치 퀸의 등장 때문에 새삼스럽게 떠오른 말은 아니었다. 볼프강은 늘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볼프강은 운명에서 도망쳤다고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사명을 잊고, 본능을 억누르며 지금까지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를 잡아먹고 빨간 모자를 잡아먹고, 사냥꾼의 가위에 배를 갈린다. 몇 번이나 경험해본 바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볼프강의 나쁜 늑대로서의 첫 기억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쁜 늑대로서의 오랜 세월 때문에 기억이 흐릿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의 병은 낫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니까. 할머니가 병에 걸리지 않으면 빨간 모자는 병문안을 오지 않는다. 빨간 모자가 병문안에 오지 않으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운명을 바꿀 거라는 위치 퀸의 말이, 볼프강은 생각났다.
볼프강은 알고 있었다. 지금 위치 퀸을 부른다면, 그녀는 자신의 앞에 나타날 거라고. 그 마법의 거울로 아마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것을 볼프강은 오랜 경험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볼프강이 굴복한다면, 위치 퀸은 뭔가 방법을 만들 것이다.
―이미 모든 나쁜 늑대는 제 휘하로 들어오기로 했어요. 나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요. 당신의 사모하는 할머니도 더 좋은 환경에서 좋은 대접을 받을 거고요.
위치 퀸은 알고 있다. 볼프강이 있는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 나쁜 늑대가 없으면 이야기는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는다. 이대로 있으면 할머니의 병은 낫지 않는다. 볼프강이 움직여야만 한다. 그렇지만 볼프강이 움직인다는 것은, 볼프강이 나쁜 늑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그렇게 돌아가면, 멈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완전히 망가트리는 방법도 있다. 마을에 나타나 할머니를 구해달라고 하는 것도, 빨간 모자를 먼저 찾아가는 것도 모두 방법이다. 이야기가 무너지면 모두는 아마 라이브러리 월드로 소환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뒤에 볼프강은 현자회의에게 붙잡힐 것이 분명했다. 그 뒤의 일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나쁜 늑대로 돌아가 위치 퀸의 휘하로 들어가느냐,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현자회의에게 붙잡히느냐. 볼프강은 고민했다. 새들이 우는 것을 멈추고 해가 질 때까지 고민했다.
볼프강이 오두막으로 돌아오자, 할머니는 깨어나 볼프강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게 오셨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생각할 거리가 있었다.”
볼프강은 오두막의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 뿐이야.”
다음날이 되었다.
오두막에는 볼프강만이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심란한 마음에 양 손을 만지작거리며, 볼프강은 문을 열고 들어올 빨간 모자를 기다렸다. 충족된 본능이 가슴을 뛰게 만들었지만, 볼프강은 냉정하려 노력했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야기였다.
운명이란 어쩔 수 없기에 운명인 것이다.
이야기가 완성되면, 모두는 라이브러리 월드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이야기에서 생긴 피해를 복구하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때를 기다린다. 상처는 나을 것이고 병은 치료될 것이다. 이야기가 완성되어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할머니를 잡아먹은 나쁜 늑대가 빨간 모자를 잡아먹고, 마침내 지나가던 사냥꾼에게 배를 갈린다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야기가 시작될지도 모르지만, 볼프강은 그럴 가능성은 당장으로는 낮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위해서는 나쁜 늑대가 필요하지만, 모든 나쁜 늑대는 위치 퀸의 부하가 됐다고 했다. 위치 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늑대를 보내서 이야기를 다시 진행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런다고 위치 퀸이 얻을 것은 없을 테니까.
마지막 남은 나쁜 늑대가 없다면, 어쩌면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건강하게 라이브러리 월드에서 손녀와 지낼 것이다.
모든 것이 그저 늑대 한 마리의 배가 갈라지면 해결되는 일이다.
볼프강은 할머니의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문이 부서졌다.
볼프강은 놀랐다.
빨간 모자는 문을 부수며 등장하지 않는다. 아픈 할머니를 병문하기 위해 얌전히 문을 열고 들어온다. 할머니에게 드리기 위한 포도주와 케이크가 든 바구니를 든 채로. 빨간 모자는 저렇게 커다란 가위를 들고 등장하지 않는다.
볼프강은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볼프강은 이 모든 것을 누가 조종했는지도 깨달았다.
“기다려라.”
볼프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빨간 모자에게 말하려 했지만, 빨간 모자는 커다란 가위를 찰칵거리며 외쳤다.
“배를 싹둑! 잘라줄 거야!”
가위를 빛내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빨간 모자의 모습에, 볼프강은 반사적으로 발톱을 꺼내고 이를 드러냈다. 나쁜 늑대로서의 본능이 맞서 싸우라고, 저런 꼬맹이따위 꿀꺽 삼켜버리라고 외치고 있었다.
―제가 만들어준 빨간 모자를 쓴, 정말 귀여운 아이랍니다. 아직 털이 푹신한 걸 좋아하는 나이니까, 당신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곤란하군.
날아가버린 양 팔을 바라보며 볼프강은 생각했다.
“복종하겠다.”
무릎 꿇은 볼프강의 말에, 위치 퀸은 코웃음을 쳤다.
“정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군. 주인에게 복종하는 자세도 배우지 못할 정도로.”
“복종하겠습니다.”
볼프강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잘린 양 팔에서는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져나간 양 팔은 볼프강의 앞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좋아, 볼프강. 너는 이제부터 나의 심복이다.”
웃음을 띈 위치 퀸의 목소리는 얼마 전 나타났을 때와는 달랐다. 이름 그대로 여왕임을 뽐내는 듯한 목소리. 그럼에도 볼프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볼프강의 주인이었으며, 주인의 말대로 길들여진 늑대가 바로 개였으니까. 개는 주인에게 복종한다.
라이브러리 월드의 규칙을 알고 있는 볼프강이기에 알 수 있었다. 라이브러리 월드의 흐름에, 그 순환에 뭔가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볼프강은 자신이 라이브러리 월드로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다른 인물들은 라이브러리 월드로 오지 못한 것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이야기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마치 볼프강의 생각을 읽은 듯 위치 퀸은 말했다.
“그녀는 미완의 이야기에 갇혀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주인공이 없어진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으니, 그 상태 그대로 남아있겠지. 내가 라이브러리 월드를 지배하고, 새로운 규칙으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 때까지는 말이야.”
볼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볼프강, 너는 ‘만월의 늑대떼’의 수장을 맡아줘야겠다. 앞으로 우리 ‘움브라’의 힘이자 무력으로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일해줘야겠어.”
위치 퀸은 손을 움직였다. 그 손놀림에 초록색 마법의 기운이 볼프강의 잘린 양 팔을 들어올려, 아직 피가 흐르는 상처에 가져갔다. 위치 퀸은 놀리듯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숨고, 도망치고, 어둠 속을 숨어다니던 너에게는 쉬운 일이겠지?”
볼프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위치 퀸의 마법에 의해 팔이 다시 붙으며 느껴지는 고통을, 작은 신음을 흘리며 참을 뿐이었다. 위치 퀸은 말을 이어갔다.
“내가 레드에게 내려준 가위는 마법의 힘을 담고 있어서, 내 힘으로도 완전히 치료해줄 수는 없어. 그 흉터는 계속해서 남아있을테고, 팔은 볼프강 네 전성기처럼 움직여주진 않겠지. 그 대신 선물을 주겠어.”
위치 퀸의 마법이 힘을 발하며, 볼프강의 양 손이 빛나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마치 갑옷과도 같은 보호구와 날카로운 마법의 발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무기들이 너에게 새로운 힘이 되어주겠지.”
“고맙습니다, 주인님.”
볼프강은 손가락과 팔을 움직여보며 말했다. 위치 퀸의 말대로 마법으로 붙은 상처자리에는 붉은 흉터자국이 남아있었고, 볼프강이 팔을 움직일 때마다 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볼프강이 신경 쓰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레드. 그런 이름이었군. 볼프강은 그 이름을 잊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볼프강은 ‘만월의 늑대떼’의 수장이 되었다.
볼프강은 그리운 기분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잘라줄 거야!”
외침과 함께 자신의 목으로 날아드는 가위를 볼프강은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공간의 틈에서 나타나며 가위를 휘둘렀던 레드는, 볼프강을 쓰러트리지 못한 것에 이를 드러냈다.
모든 이야기가 모이는 라이브러리 월드. 그 중에서도 중심에 있는 시놉 시티의 깊은 곳.
시놉 시티는 몇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가장 높은 곳에는 라이브러리 월드를 관리하는 ‘현자회의’가 머무는 장소가 있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시놉 시티의 가장 아래는 ‘하층’이라고 불리우는 복잡한 빈민가였다. 그 깊은 어딘가에는 움브라의 비밀 기지가 있었다.
그런 움브라의 비밀 기지의 외딴 복도에서, 볼프강은 레드와 마주했다.
“...무슨 짓이지?”
볼프강은 레드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기습이 실패해, 가위를 찰칵거리며 싸울 자세를 잡는 레드와는 다르게, 볼프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어떠한 동요도 없는 볼프강의 목소리.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는 눈빛에 레드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레드는 마법가위 ‘피카부’를 위협하듯 찰칵거리며 말했다.
“몰라서 물어? 오늘에야말로 널 쓰러트릴 거야, 멍멍아!”
멍멍이. 모욕적인 발언에 볼프강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레드는 볼프강이 달려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볼프강은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움브라 내의 싸움은, 위치 퀸 님이 금지하신 걸 잘 알 텐데.”
“윽.”
볼프강의 지적에 레드는 찔린다는 듯 신음을 냈다. 위치 퀸. 볼프강과 레드가 소속된, 이야기 속의 악당들이 모인 집단 ‘움브라’의 수장. 그녀의 명령은 움브라에서는 절대적이었고, 특히 레드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볼프강은 싸늘한 눈빛으로 레드를 보며 말했다.
“위치 퀸 님이 명령하신 이상, 나는 너와 놀아줄 시간이 없다. 오늘도 나에겐 해결해야 할 임무가 있다. 임무도 없는 꼬맹이와는 달라.”
“이게!”
레드는 볼프강의 도발에 이를 드러내며 다시 양 손으로 가위를 휘둘렀다. 그렇지만 볼프강은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가위를 피해내고, 휘두르는 가위의 힘이 떨어졌을 때 양 손으로 가위를 붙잡았다. 레드는 힘을 주며 가위를 빼내려 했지만, 힘은 볼프강이 위였다.
“마음에 안 들어! 왜 너 같은 건 간부인데 난 아무 지위도 없는 건데! 왜 망할 멍멍이도 움브라에 있는 거냐고! 너 같은 건 내 가위로 잘라버릴 거야!”
마치 궁지에 몰린 어린아이처럼 소리치는 레드를 보며 볼프강은 한숨을 내쉬었다.
볼프강이 위치 퀸의 심복이 되고도 시간이 흘렀다.
레드, 빨간 모자는 같은 날 움브라의 일원이 되었다. 레드는 볼프강을 보자마자 달려들려 했지만, 위치 퀸이 말리자 겨우 참는 모습이었다. 볼프강은 레드가 위치 퀸을 존경하고, 그녀처럼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위치 퀸이 말릴 수 있는 것은, 위치 퀸의 앞에 있을 때의 레드 뿐이었다.
레드는 위치 퀸과 같은 악당이 되고 싶어했고, 그 시작으로 오랜 원수인 나쁜 늑대, 볼프강을 처단하고자 했다. 위치 퀸이 보지 않는 곳이면 레드는 언제나 볼프강을 습격했다. 위치 퀸이 하사한 마법 가위와, 그 가위의 힘으로 공간을 자르고 숨을 수 있는 레드의 능력은 확실히 강력했다.
그렇지만 볼프강은 아주 오랫동안 나쁜 늑대였다. 비록 팔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경험이 부족한 꼬맹이에게 당해주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볼프강은 이를 악 문채 자신과 힘겨루기를 하는 레드에게 말했다.
“할머니는 늘 침착하고 현명했는데, 그 손녀는 늘 흥분하고 어리석군. 위치 퀸 님은 역시 사람을 볼 줄 아는 분이다. 그런 어린애에게 높은 자리를 주지 않을 정도로 현명하고.”
“이 멍멍이가! 감히 할머니 이야기를… 아야!”
볼프강의 도발에 레드는 다시 발끈했지만, 이내 비명을 질렀다. 양 팔을 붙잡은 채로 볼프강이 레드의 머리를 받아버렸으니까. 레드는 난데없이 박치기를 당한 이마가 아픈 모양이었지만, 차마 가위를 놓지도 못하고 울쌍만 지을 뿐이었다.
“흥분하는 건 나쁜 버릇이다. 위치 퀸 님이 너에게 하사한 마법 가위와 그 능력이 있으면, 네가 침착하고 현명하게만 움직인다면 누구든 쓰러트릴 수 있다. 그리고 네가 그럴 수 있다면 위치 퀸 님도 너에게 높은 지위를 내리시겠지.”
“시끄러워, 이 영감탱이! 매번 그런 식으로 꼰대처럼 잘난 척이나 하고!”
볼프강은 레드의 말도 질렸다는 듯, 레드와 가위를 통째로 들어올려 복도 저편으로 던져버렸다. 레드는 날아가던 중 겨우 몸을 틀어 벽에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다시금 볼프강에게 달려들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난 바쁘다. 놀 상대를 찾는 거면 다른 녀석을 찾아봐라.”
그 말을 끝으로, 볼프강은 등 뒤에서 외치는 레드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복도를 걸어갔다. 조금 걸어 코너를 돌자, 엿보고 있던 듯한 부하 늑대가 말했다.
“두목님, 저대로 놔둬도 됩니까? 매번 두목님만 보면 덤벼들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지.”
볼프강이 무시하고 걸어가자, 부하 늑대는 뒤를 졸졸 따라오며 말했다.
“그야, 뭐, 눈물 쏙 나오게 혼내준다든가, 버르장머리를 고쳐준다든가…”
“움브라 내의 싸움은, 위치 퀸 님이 금지하신 걸 잘 알 텐데.”
부하 늑대의 말에 볼프강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그 박력에 부하 늑대는 자신도 모르게 두어걸음 뒷걸음질을 치고는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헤, 헤헤! 그, 그러믄요! 잘 알고 있습죠! 다만, 저기, 그, 뭐시기냐, 두목님이 귀찮으실 것 같아서…”
“내버려둬라. 저 녀석이 저러면서 실력이 늘어나면 우리 움브라에도 좋은 일이니까. 혹시라도 다른 늑대 녀석들이랑 꼬맹이에게 덤빌 생각이라면, 위치 퀸 님의 명령을 거스르지 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두지.”
“알고 있습니다요! 네!”
송곳니를 드러내는 볼프강의 말에, 부하 늑대는 고개를 열렬히 흔들고는 갈림길에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볼프강은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목적지를 향했다.
지금의 볼프강은 그저 나쁜 늑대들의 수장이다.
라이브러리 월드를 지배하려는 사악한 마녀 위치 퀸의 제일가는 심복이자, 그 힘이자 무기인 ‘만월의 늑대떼’의 수장.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아직 라이브러리 월드에서도 그 존재를 아는 이가 드문 존재.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하겠지. 볼프강은 생각했다.
라이브러리 월드의 이변을 해결하기 위해, 현자회의는 ‘스매시 레전드’를 개최했다.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전설의 비보, ‘라이트 오 라이트’를 건 싸움.
마치 그것이 목적이었다는 듯 움브라는 위치 퀸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참가했다. 그리고 오늘, 위치 퀸이 자신을 부른 것 역시 그런 이유라고 생각했다.
이제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도 끝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볼프강이 상관할 바 아니었다.
개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한다. 그리고 위치 퀸은 그리 나쁜 주인도 아니었다. 볼프강의 본능과 역할을 충실하게 해줬으니까. 볼프강은 그저 운명에 순응하기로 했다.
나쁜 늑대가 자신의 본능이자 운명이라면, 그에 따른다.
운명을 거스르겠다는 주인이 운명을 목줄로서 자신을 묶어둔다면, 그에 따른다.
운명은 어쩔 수 없기에 운명인 것이니까.
그렇지만, 언젠가.
볼프강은 안경을 만지작 거렸다.
어깨의 흉터가 시큰거렸다.